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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제34화 조선변호사회(5)|<제자 정구영>정구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구한말 변호사들>
광무9년(1905년)변호사법이 공포된 이후 이 땅의 제1호 변호사는 이면우로 전해진다. 그는 구한국시대 평리원 판사로, 어떤 경위를 통해 언제 변호사를 하기 시작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우리보다 20년 이상 연장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변호사 시험제도가 있던 때가 아니고 구재판소의 판·검사나 법부의 서기관을 지낸 사람이면 변호사 자격을 주었기에 그로 인해 변호사 개업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다 일본에 가서 이른바 신 법률을 배워온「동경유학생」이라는 것을 앞세웠기에 그 이력도 만만치 않았다.
여하튼 그가 변호사가 되어 첫 사건으로 진주의 어느 살인사건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는 당시의 변호사가 어떤 일을 했나 하는 것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철도도 없던 때라 사인교를 타고 한성에서 경남도청이 있던 진주까지 문자 그대로 천리원정을 하였다 한다.
며칠을 걸려 도착하고 보니 현지에서는 피고인 가족들의 말로 한성에서 변호사가 온다는 소식이『한성에서 이모가 피고인 대신 죽으러 온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다.
변호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대해서는 일반이나 관찰사가 마찬가지였다.
관찰부에 들어가니 사인교에서 내려 장죽을 들고 들어오는 이면우를 보고 재판장인 관찰사가 이르기를『영감,「변호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게 뭐하는거요』하고 묻더라고.
이씨가 큰 소리로『신 법률을 모르시오, 영감. 어서 설석을 하시오』라며 법정을 꾸미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방석 몇 개를 이리저리 놓아 그 위에 앉아 이를 법정이라 하고 구식 그대로 재판을 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씨가『어서 판결선고를 해 주시오』하고 요구했으나 관찰사는 판결언도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라 쩔쩔매고 있노라니 이씨가 붓글씨로『주문, 피고인 아무개 무죄, 이유는 증거 없음』이라고 판결문을 써주어 관찰사로 하여금 낭독케 했다 한다.
그런 일도 있을 법 하던 때였다. 역시 그 무렵의 일이라고 하는데 김정목 변호사(한국투자공사 사장 김홍경씨의 부친)가 전남지방에 있는 몇천 정보의 노전(갈대밭)소유권을 다투는 사건을 의뢰 받았을 때의 일이라 한다.
그때 김정목 변호사는 자신은 가지 않고 그의 사무원으로 있던 서정희(전 국회의원 서범석씨의 부친이며 후에 한규설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맡아 운영하던 분)를 대리로 광주까지 출장시켰다 한다.
서정희가 사인교로 광주까지 8백릿 길을 가서 오수경(오수정의 알을 박은 색안경)을 쓰고 관찰부로 들어가니 그 위풍이 당당했다.
그는 관찰부에 들어가자마자「변호사 김정목 법률사무소 사무원 서정희」라고 인쇄한 큼직한 명함을 내놓고 자신을 소개하며『노전사건의 재판을 변호하러 왔다』고 말했다.
광주지방 재판소의 재판장 사무를 맡은 관찰사는 변호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때까지 변호사를 접촉한 일이 한번도 없었으며 더욱 법률사무소의 사무원이 한문의 뜻으로 변호사와 관계가 있는 사람인줄은 짐작했으나 어떻게 접촉해야 실수가 없을는지 몰라『지시대로 하겠다』고 했다 한다.
그래서 서씨는 전에 제출해 놓은 소지(지금의 소상)대로『원고가 노전을 가져야한다』고 그대로 제사(지금의 판결)를 써달라고 하였다 한다.
오수경을 쓴 그의 위풍에 눌렸던지 관찰사는 그 자리에서 원고승소의 판결을 써주었다고 하니 이상의 이야기가 내 자신이 직접 본 일이 아니고 뒷날들은 것이지만 그와 비슷한 일로 있었을 법한 일로 생각된다.
변호사가 무엇인지 모르던 때라 깊은 법률지식보다는 신수가 잘 생기고 구변이 좋으면 통하던 때였으리라 추측된다.
이면우에 이어 변호사가 된 사람이 홍재기 김정목 정명섭 홍우석 장수 최진 등이고 뒤이어 유문환 박만서 심종대 황철수까지를 합쳐 구한국시대의 변호사랄 수 있다. 구 한국시대의 가장 마지막 변호사라고 할 수 있는 황철수는 종로소학교 뒷문 부근에 사무소를 차릴 당시 간판 삼아 세운 큼직한 말뚝에「진성 전문 우등졸업, 변호사시험 장원급제, 변호사 황철수 법률사무소」라고 썼었다.
그 간판 겸용의 말뚝을 보고「우등 졸업」은 무엇이며 더욱「장원급제」는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가 장원을 딴 대한제국의 변호사 시험이란 다른 응시자 없이 단독으로 치른 것이고 야간으로 다닌 졸업반도 단1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선전방법을 딴 것인지는 몰라도 몇 년 뒤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 변호사들이 흔히 개업을 알리는 말뚝에「훈× 등 전 중의원 의원, 법학사 아무개」식의 간판을 건 것을 자주 보았다.
앞서 말한 김정목 정명섭 홍우석 등 3명은 구한말 마지막으로 치른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로 평리원의 판사를 지낸 사람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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