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5)제32화 골동품비화40년(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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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진사연적>
해방되기 여러 해 전에 산 진사연적은 내가 잠으로 아끼는 귀물이다. 크기는 보통 연적과 다름이 없다. 한데 네모가 지고 납작한 전면을 싸고도는 새빨간 진사의 빛깔이며 입을 딱 벌린 두 마리의 학이 마주보는 도안의 구성으로 보나 색깔의 조화로 보아 아주 재미있는 물건이다.
그즈음 발바닥이라는 별명이 붙은 일인 골동상 전중의 활약이 대단했다. 발바닥(전중)은 그 진사연적을 추전이라는 사람에게서 사서 창랑 장택상씨에게 가지고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연적값 4백원을 3백원은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물건을 하나 갖다가 팔라고 하더라한다. 창랑의 물건으로 재미를 못 본 발바닥(전중)이 거절하고 결국 내가 손에 넣게 되었다.
발바닥(전중)네 가게에서 그 연적을 사서 보자기에 싸 가지고 나오는데 마침 창랑댁에 자주 드나들며 거간을 하던 이순행씨가 들어오다가 『그거 뭐예요』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면서 냉큼 빠져 나왔다.
며칠 밤을 새우며 만져보고 손에 쥐어보고 또 흥분해 마지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5개월 동안 연적값 4백원을 갚느라고 혼이 났으나 그때까지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창랑도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몹시 아쉬워했다.
6·25이후 창랑이 외무부장관으로 있을 때 나를 만나기만 하면 『박 선생, 그 물건 나한테 양도하시오』하고 조르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아, 선생은 좋은 물건을 수두룩하게 갖고 계시면서 그걸 왜 달라고 하세요. 나눠서 가집시다』하고 끝내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 연적이 진사채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리 모양이 예쁘기로서니 그리 애지중지하고 탐낼 물건도 못되었을 것이다. 흔한 청화나 혹은 칙칙한 산화철의 철사채는 값으로나 심미적 가치로 보아 진사로 채색이 된 사기보다는 평균으로 쳐서 조금 떨어지는 까닭이다.
나는 그 진사연적을 생각하면 유교사상이 빚은 조선조 중기와 후기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오늘날 우리가 완상하는 골동에 대한 취미가 전혀 정반대로 엇갈리는 것을 깨닫고 그 점을 무척 흥미 있게 여긴다.
일제시대에 골동을 모으자면 언제나 고려청자로부터 출발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애호하는 분청사기를 거치는 게 순서이자 나 역시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다만 고려물이나 분청이 너무나 비싸서 연적도 사고 필통도 모으고 하는 것은 조선인 누구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처음 진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창교란 사람이 『이조의 철사』와 『이조의 진사』란 책에서 앞으로 철사와 진사가 없어질 것이라고 예고한 내용을 읽고부터 이다. 그후 나는 진사나 철사라면 우선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수에 있어서는 청화가 훨씬 많으므로 지금 수장하고 있는 물건 가운데 청화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물론이다.
고려는 청자요, 이조의 백자라 하는데 어떻게 청화나 진사·철사 등의 채색을 말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원래 조선조의 백자는 그 바탕이 모두 백자이지만 거기에 몇몇 가지 그림을 곁들여 그리게 된데서 이러한 명칭이 비롯한 것이다.
청화는 광물질인 산학「코발트」로 만든 안료로 하늘색 빛깔이 난다. 원래 「페르샤」쪽에서 생산해서 「사라센」 사람들이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전해진 것이다.
조선중기 까지만 해도 회회청이라 불러 하도 귀해서 이를테면 백자가운데 청화로 그린 그림은 아주 간결했건만 나중에 국산 청화가 개발되면서 항아리에 막 바른 흔적이 엿보인다.
철사는 산화철을 다량 함유한 적색토에서 채취한 안료이다. 마지막으로 진사는 산화동을 재료로 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주점사기나 진홍사기로 불려왔다.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 골동의 값어치로 보아서 진사와 철사가 청화보다 더 귀하고 순수한 백자보다는 한층 더 귀했으나 어떻게된 셈인지 옛날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역순으로 등급을 매겼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 내력을 따지면 이렇다.
즉 세조는 술잔을 비롯해서 일상용기를 은제로 만들어 쓴 모양이었다. 그때 군신들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해서 백자로 바꿀 것을 건의했다는 얘기다. 그후부터 백자의 생산을 아주 제한했고 등급을 매겨서 최상품은 임금이 사용하고 남는 것을 사대부가 사용하게 했다. 따라서 서민이 백자를 굽거나 사용하면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후 오늘날 청화라 부르는 회회청이 중국에서 수입되면서부터 궁중에서 사용하는 사기그릇에만 청화를 바르게 했다.
궁중에서 쓰는 그릇에는 무엇에든지 청화를 멋대로 바르게 해서 실록에 『청홍아리』를 썼다는 기록이 적혀있을 정도이다. 후기로 내려오면서 국산 청화가 개발되어 널리 사용할 수 있어도 그래도 모자랄 때는 어쩔 수 없이 철사나 진사의 안료를 써서 청화에 대신했다.
오늘날에 보는 바와 같이 조금 오래된 청화백자 사기의 그림이 아주 간략하고 세필인 것은 다 이 산학「코발트」안료가 희귀했던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궁중에서 사용하는 사기그릇에는 청화를 아낌없이 사용했다는 점은 청화로 그린 용항아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청화로 그린 용항아리는 용의 발톱 수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품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이 또한 재미있다.
즉 중국의 제실에서 쓰는 용항아리에는 발톱이 다섯 개나 그려져 있는데 만약 중국의 사신이 왔다가 발톱이 다섯 개로 그려진 용항아리를 보았다가는 큰 꾸지람을 듣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톱이 네개로 그려진 용항아리만 쓰게 되어있다. 그것도 왕실에 한하고 지체가 높은 권세가나 왕실의 종친은 3개의 발톱이 그려진 용항아리만 써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역적누명을 쓰게 된다.<계속>【이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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