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제32화>골동품비화40년(14)|박중래(제자 박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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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계룡산」바람>
우리조상이 쓰던 밥사발 국사발을 들고 가보라고 황공해 하던 일본사람의 기호는 실로 그 내력을 소상히 알면 이해가 갈 만도 하다. 일인들은 막연히 고려소가 기가 막히다는 얘기만 들어왔을 뿐 소위 전세의 찬기가 우리나라의 일상용 밥그릇인 줄 몰랐던 것 같다.
한일합방 후 조선왕조 실록의 초기부분을 뒤지고 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사기그릇을 보고 비로소 분청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여하간 고려청자는 원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었지만 분청은 일본인의 기호 때문에 그 진가가 한층 더 밝혀진 점도 없지 않다. 일본의 어느 식자는 분청의 그 온아한 기품이나 고요한 정적감, 그리고 분방한 기개가 동양정신의 극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겸허하게 칭송해마지 않는 글을 본 일이 있다.
불과 4, 5백여년 전의 우리조상은 김치보시기 하나라도 동양정신의 극치와 통하는 물건을 만들어 썼다고 하는데 대해 오늘날의 자손은 부끄러운 점이 없지 않다.
아무튼 어떤 일본인은 분청 차 그릇을 오래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고 하면서 이런 얘기를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오래되거나 보존상태가 나쁘면 태토를 감싼 유약이 녹아 붙어 유리질로 된 얇은 피막이 갈기갈기 쪼개져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이 그어지는 수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더 운치가 있고 보기 좋다고 아끼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유리 피막이 쪼개진 분청을 몇 대를 두고 내리 쓰게 되면 어느 것이나 차의 성분이 그 틈바구니로 스며들어 그 안에 바른 백분이 변색한다는 것이다.
원래 분청은 그릇을 빚은 다음 각종 문양을 찍거나, 그리고 그 위에 하얀 백분을 바르기도 하고 백분에 푹 담그기도 한다. 하여간 몇 대를 내려쓰는 동안 피막이 깨진 틈 사이로 차가 스며들어 그 안에 바른 백분이 찌들고 고동색으로 변했다는 뜻이겠다. 가령 변하지 않은 분청다기가 온값이면 그렇게 차물에 찌든 그릇은 금값이라고 했다.
일견 일본인다운 다작스러운 취미라고 보겠으나 그것도 우리조상이 만든 물건을 너무나도 애완한 나머지 그렇게 된 것이라 하니 너그러이 보아줄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분청은 만든 수법으로 보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분청하면 무어니 무어니 해도 계룡산 요지를 으뜸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충남 공주군 반포면에 있는 계룡산 요지에서는 상당한 사기그릇을 구워냈었다.
하여간에 일본인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져서 총독부에서 실시한 고적조사 가운데 요지를 조사한 것은 아마도 계룡산요가 유일한게 아닌가 한다.
앞서 일제시대 골동상의 얘기를 잠깐 하던 끝에 지금의 을지로2가와 3가 사이에 있었던 지내란 자는 상재가 어지간히 뛰어난 셈이다. 왜 그러냐하면 일본사람이 막 분청사기, 즉 그들 말대로 「삼도수」의 정체를 알고 나면서부터 부적 계룡산 제품에 입맛을 다시게 되자 옥호마저 계룡산이라고 따다 붙였다. 계룡산에서 구워낸 물건은 일본인 다인기질에 고 들어맞았다. 멋대로 생긴 사발이나 대접의 모양이며 귀알에 묻혀 아무렇게나 발라버린 백분이 자국이라든지 사화철 안료로 아무 생각 없이 그린 무늬가 꼭 그러했다.
지내가 장사를 시작하고 그랬는지 그 전부터 그랬는지 하여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계룡산 분청사기 조각 하나가 일본에 가면 10원을 넘어 받는다고 했다. 그때 돈 10원 같으면 적어도 요새 돈 1만원은 더 될 터인데 요새 고려청자 파편조각도 1만여원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하고 생각해 볼 때 과연 신기한 일이다.
총독부에서 요지를 조사한 것은 1930년께다. 그후 계룡산 요지에 관심을 가진 공주지방법원의 서기 한 사람이 그 근방을 자주 왕래하며 불완전한 채 버려진 것을 다량으로 수집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원래 석물이나 기타 여러 가지 골동을 취급하던 지내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지내는 이것을 기화로 계룡산을 독점하였다.
일본의 다인들은 깨어진 다완을 계룡산 요의 파편으로 때워 뻐겼다.
이렇게 되니까 동업자들 측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계룡산요 근처의 땅을 마구 사들였다. 그래서 한때 골동가게에는 계룡산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계룡산 요지게 대해서는 그럴 듯한 애화가 있다. 원래 계룡산은 조선 건국시에 도읍을 할 예정이었고 예부터 영산으로 알려져 왔던 터이다. 백제시대에 천호사라는 대가람이 있어 승병 약4만이 주둔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동학사를 비롯해서 사원 및 당탑을 세웠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다.
고려가 불교를 극히 보호했으므로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까지 계룡산일대의 산간에는 사원과 승려가 상당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국시가 불교를 억압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후부터 사원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서 승려들이 살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으로 해서 대부분의 산간사찰에서는 요를 만들고 사기를 구웠다는 얘기가 있다.
하여간 세조대에 이르자 조카 단종을 죽인 선조는 마음속의 뉘우침으로 해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억누르고 비교적 권장해서 원각사도 짓게 한 것이다. 세조는 계룡산 동학사 주변의 사방 20리를 사령으로 삼게 해서 크게 요업을 일으키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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