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우리 운명 … '산울림' 대 이어 울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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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주요 자산인 산울림소극장의 임수진 극장장(오른쪽)과 임수현 예술감독. 원로연출가 임영웅씨와 번역가 오증자 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 부부의 자녀로 ‘산울림 2기’를 이끌고 있다. 임 극장장은 소극장의 역할을 설명하며 “관객이 넘쳐 보조방석이라도 놓는 날엔 관객과 배우 사이의 거리가 무릎이 부딪칠 듯 가까워진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두 살 터울 남매가 가업을 이었다. 29년 전 부모가 사재를 털어 시작한 일이다. 23㎡(7평) 남짓한 무대, 75개의 객석. 배우의 말과 표정, 동작 이외에 어떤 기교도 통하지 않는 이 작은 공간이 이들이 물려받은 일터다.

 “누군가는 지켜가야 할 일이죠. 화려한 볼거리가 많아질수록 다른 한편으론 보다 깊이 있는 문화적 소양에 굶주린 사람이 늘어날 테고, 그런 만큼 정통 연극의 가치는 더 귀해질 테니까요.”

 7일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임수진(51) 극장장과 임수현(49·서울여대 불문과 교수) 예술감독을 만났다. 지난 4일 시작해 석 달 동안 이어질 기획 공연 ‘고전극장’ 준비로 한창 바쁜 때였다.

 ‘누군가는 지켜가야 할 일’이라고 에둘러 말한 연극은 이들에게 숙명처럼 주어졌다. 원로 연출가 임영웅(78)씨와 번역가 오증자(79) 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 부부의 자녀로 태어날 때부터 시작됐다. 두 자녀가 극장장과 예술감독을 맡은 건 2012년부터다.

 “저희 인건비요? 그게 나오면 우리가 왜 뛰어들었겠어요? 식당 일하고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인건비 줄이려니 가족을 동원할 수밖에요.” 

 -산울림은 국내의 대표적 소극장인데 인건비도 안 나온다니, 그렇다면 누가 연극을 하겠나.

산울림소극장을 만든 임영웅(오른쪽)·오증자 부부의 10년 전 사진. 2004년 임영웅 연출가가 보관문화훈장을 받던 날이다. [사진 산울림소극장]

 ▶임수진=연극계가 가난한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외국도 마찬가지더라. 아버지가 산울림소극장을 만든 게 1985년이다. 공연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집 대신 마련했고, 아직도 극장 3층은 부모님 집이다. 우리 극장에서 올리는 공연 기획과 작품 번역은 어머니가 다 하셨다고 보면 되는데, 모두 무보수였다. 그래서 극장이 유지됐다. 배고픈 연극판이지만, 아직도 연극을 하겠다며 도전하는 진지한 젊은이들이 많아 위안을 받는다.

 (※두 사람은 비교적 오랜 기간 해외 문화를 체험했다. 임 극장장은 1991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에 거주했고, 임 예술감독은 2002년까지 파리에서 11년 동안 유학했다.)

 -소극장 연극의 매력을 꼽는다면.

 ▶임수진=아버지가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본 게 여섯 살 때다. 그 후 지난해 공연까지 수십 번 아버지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는데, 그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배우의 상태뿐 아니라 관객의 상태에 따라서도 작품은 달라진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 숨소리를 느끼며 소통할 수 있는 게 소극장 공연의 큰 매력이다. 지난해 12월 산울림 무대에 올린 ‘편지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현악 4중주로 연주했다. 한 관객이 "내가 평생 들어온 그 어떤 운명교향곡보다 감동적”이라는 말을 전해왔다. 소리의 풍성함을 놓고 말하면 오케스트라 공연과 소극장 공연이 어찌 비교가 되겠나. 하지만 감동은 오히려 작은 공간이 더 클 수 있는 게 소극장 공연의 맛이다.

 ▶임수현=그런데 문제는 이런 소극장 공연은 기본적으로 자생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100석도 안 되는 소극장에서 입장료 올려봐야 별 효과가 없다. 배우들이 ‘투 잡’ 뛰지 않으면 생활이 힘들다.

 -가족이 모두 한 배에 탔다. 위험부담도 있겠지만, 시너지 효과도 크겠다.

 ▶임수현=가족이 같은 일을 하니, 우연히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곤 한다. 지난해 첫 시도한 ‘고전극장’도 가족 대화 중에 기획된 공연이다. 어머니가 "우리 극장에선 집중이 잘 돼, 낭독 형태의 공연이 어울리겠다”고 한마디 하자, 곧이어 "요즘 사람들 고전의 제목만 알지 실제 접해볼 기회가 없다”는 얘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가 제게 “수현이가 고전목록을 한번 뽑아봐라”고 하면서 기획으로 연결됐다.

 ▶임수진=부모님 건강이 안 좋아져서 걱정이다. 2012년 아버지가 극장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 30년 가까이 매일 오르내린 계단이었다.

 -지금까지 ‘고전극장’에서 어떤 작품을 했나.

 ▶임수현=지난해 ‘검은 고양이’‘변신’ 등 다섯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올해는 지금 공연 중인 ‘설국’을 비롯해 ‘분노의 포도’‘홍당무’ 등 여섯 작품을 4월 6일까지 공연한다. 앞으로 100작품을 채우는 게 목표다.

 -내년이 산울림 개관 30주년이다. 2세대 ‘산울림소극장’이 추구하는 이상은.

 ▶임수현=프랑스 파리 생 미셀 거리 주변에 있는 소극장 ‘위세트(Huchette)’가 우리 극장의 모델이다. 위세트는 1957년부터 60년 가까이 ‘대머리 여가수’‘수업’ 두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 산울림보다도 규모가 작은 극장이지만, 파리의 관광 명소가 됐다. ‘대머리 여가수’ 연출가가 세운 극장인데, 현재 그 자녀 세대가 운영하고 있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그 뚝심을 닮고 싶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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