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헬리콥터 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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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벤’이 헬리콥터에서 내려온다.

 지난 8년간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군림해 온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이달 말 퇴임하는 것이다. 2006년 초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의 바통을 받아 취임한 지 8년 만이다. Fed 의장으로 그가 마지막 연설을 한 곳은 동료 경제학자들 모임인 미국경제학협회(AEA) 연례총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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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냉키는 3일(현지시간) 기조연설에서 “경제가 상당히 회복됐다. 앞으로 몇 분기 동안 성장이 예상된다”며 “지난해 12월 양적완화(QE) 규모 축소 결정이 경기부양적인 통화정책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에선 퇴장을 앞둔 그에 대한 헌사가 넘치고 있다. 그의 공로는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 속에서 미국 경제를 구해 냈다는 것이다.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대공황 이후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을 거론하며 전쟁을 우려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미국 경제는 훈풍을 맞고 있다. 실업률은 5년래 최저치인 7%까지 떨어졌다.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지난 17분기 중 16분기나 성장했다. 주가는 사상 최고치 행진 중이다. 미국 경제가 적어도 경기 침체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위기 초 그가 쓴 비책은 크게 세 가지였다. 돈줄을 풀었고(통화공급), 금융기관이 빚을 못 갚으면 대신 갚겠다고 약속했고(채무보증), 금융기관에 돈을 넣어줬다(자본확충). 버냉키는 역사적인 공황을 연구한 경제학자답게 19세기 영국 런던의 금융 중심지인 롬바르드스트리트의 금융공포로부터 배운 교훈을 그대로 따랐다. 신용공포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면 중앙은행이 우량은행에 ‘신속하게, 조건 없이 돈을 빌려주라’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이 더 높이 사는 것은 그 다음이다. 2010년 그가 Fed 의장으로 재지명됐을 때 미국 경제는 여전히 기운을 못 찾고 있었다. 그는 QE를 본격적으로 단행했다.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무제한으로 돈을 풀었다.

 사실 QE는 성공하기 힘든 정책이었다. 20년대 독일에선 마르크화를 찍어 수출을 늘리고 경기를 활성화하려다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90년대 일본은 통화량을 5배나 늘리고도 경기를 일으키지 못했다. 회의론자들은 경기는 살려내지 못하고 인플레이션만 높일 거라고 비난했다. 주체할 수 없이 달러가 풀리니 달러화 가치가 약해져 세계 금융시스템이 붕괴할 거라는 종말론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인플레는 일어나지 않았다. 달러도 힘을 잃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의 실험은 성공적이다. 그 힘은 시장과의 소통에서 나왔다. 그는 Fed의 장기 인플레 목표와 실업률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전까지 Fed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리 제시한 목표가 통화정책 유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버냉키는 Fed가 가려고 하는 길을 시장과 대중이 정확히 알아야 중앙은행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다고 믿었다. 100년 Fed 역사의 침묵을 깨고, 통화정책 배경을 기자간담회에서 설명하기 시작한 것도 그였다. 버냉키는 3일 연설에서 “Fed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은 Fed 의장이 됐을 때부터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그늘은 있다. 그는 ‘헬리콥터 벤’이란 자신의 별명처럼 경기 부양을 위해 전례 없이 돈을 풀었다. 3조 달러(약 3150조원) 이상 규모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내려오지만, 그가 뿌린 돈은 그대로 남아 있다. 돈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이 많아지면 버블이 커지고 위기가 재발하는 것이 경제의 속성이다. 이 돈을 어떻게 부작용 없이 거둬들이느냐가 Fed의 당면 과제다. 그건 떠나는 버냉키가 아니라, 후임자인 재닛 옐런 차기 의장의 몫이다. 버냉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옐런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헬리콥터 벤=대공황 전문가인 벤 버냉키 미 Fed 의장의 별명. 2002년 Fed 이사 시절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져들면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주장을 펼친 데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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