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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7)|<제자 박갑동>박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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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침략군 배치>
김일성은 전 힘을 무력통일에 집중시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최고기관으로서 최고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멤버」는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이승엽 김두봉 김책 강건 등 7명으로 구성하여 자기가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는 이 최고군사위원회의 밑에 군당장·사단장 및 각 도당위원장을 포함하는 전선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김일성은 6월10일 평양에서 소위 인민군사회장회의를 소집하여 특별명령을 내렸었다.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특별명령에 따라 인민군 총 참모장 강건이 각 사단장 및 여단장에 대하여 각 부대는 6월23일까지에 전투 배치를 위한 이동을 완료하도록 전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같은 날 10일에 김웅(중장)을 군단장으로 하는 제1군단이 편성되었으며, 2일 후인 12일에 무정(중장)을 군단장으로 하는 제2군단이 편성되었었다.(제2군단장 무정은 뒤에 후퇴시기에 김일성에 의하여 체포 감금당하고 최현이 후임 군단장으로 된다. 그리고 제1군단장 김웅은 일시 대장·민족보위성 부상까지 되었으나 그 뒤부터는 여러 번 강직을 당하여 지금은 형편없이 떨어져 있다.
당시 평양에서의 풍문에 의하면 김웅의 친동생이 한국에서 반공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나 김웅의 동생이 누구인지, 또 그러한 사실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제1군단은 서부, 제2군단은 동부에서 이른바 전선을 담당하였다.
각 군단소속의 부대는 38선 전선으로 아무도 몰래 이동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평양의 사동에 주둔하고있던 유경수(김일성의 동서.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의 누이동생의 남편)를 여단장으로 하는 북한에서 최신식 무장부대였다.
제105전차여단(서울 점령 후에 사단으로 승격) 은『민족보위성 훈련계획에 의하여 대이동작전훈련에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그 부대원들까지 속여 6월18일 평양을 출발하여 19일에는 강원도 철원에 도착해 20일에는 철원의 남방 연천 방면의 38선에 따라 배치되었었다. 그리고는 6월21일에는 전무기의 총구를 남쪽으로 향하여 실탄을 재고 특별명령을 대기케 하였었다.
이렇게 하여 6월23일까지에는 옹진반도 방면에는 제3경비여단, 해주 방면에는 제7경비여단, 개성북방에는 제1사단 및 제6여단, 연천 방면에는 제3사단·제4사단 및 게105전차여단, 화천·양구 방면에는 제2사단·제12사단을, 배양 방면에는 제5사단이 전투대세를 갖추어 전개를 완료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2선으로서 황해도 시변리에는 제7경비여단의 예비대가, 강원도의 간성 방면에는 제13사단 및 제1경비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1950년6월23일 당시 북한 무장군이 남침의 전투배치를 완전히 마친데 비해 한국군은 옹진반도에 제17연대, 개성지구에 제1사단, 동두천 지구에 제7사단, 춘천·원주지구에 제6사단, 주문진·강릉지구에 제8사단, 서울에 수도사단, 대전에 제2사단, 광주에 제5사단, 대구에 제3사단 등으로 평상시대로 이었으며 북한군의 전투배치를 알지 못하고 38선에는 평상시의 4개 사단만 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와 경찰로써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은 또 다시 그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남한을 정복하여 자기의 독재정권을 부산·목포, 그리고 제주도까지 그대로 연장시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때 박헌영의 입장은 곤란하였던 것이다. 김일성의 이러한 노골적인 야욕과 움직임을 잘 알고있지만 막아볼 아무 구실도, 수단도 갖고있지 못하였었다.
김일성이 남노당 지하당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기자신의 무력으로 남한을 군사적으로 정복할 것을 결정하였었을 때 박헌영의 발언권과 비중은 북한정권 안에서 한량없이 저하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이어 왔다. 그것은 김일성과 이승엽의 동향에서 확실히 나타났었다. 김일성이 남한문제를 의논할 때 박헌영과 하지 않고 이승엽을 불러서 하기 시작하였었다.
이는 김일성이 자기를 중요시한다고 알게되자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 같이 날뛰며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김일성은 이로써 박헌영과 이승엽을 이간시키며 이승엽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승엽은 박헌영의 심복으로 남노당 안에서는 박헌영의 다음가는 지위까지 발탁되었으나, 그러나 박헌영이 참으로 마음속으로 그의 후계자로 믿는 것은 자기가 아니고 김삼룡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로당에는 이승엽의 영향은 거의 없었으나 김삼룡의 영향이 컸었다. 이북 땅에 가있는 남노당원 중에도 이승엽 파로서는 조두원 박승원·이원조 등 일제 때 전향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경력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엽은 실권의 지위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뿌리 없는 풀과 같이 허공에 뜨는 것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적대될 세력은 김삼룡 일당이지 직계세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이승엽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한의 무력제압을 앞두고 김일성은 이승엽의 포섭, 따라서 박헌영과 이승엽의 이간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점령지구의 당·정당의 전권위원으로 남노당 최고책인 박헌영이 되어야할 것을 박헌영을 평양의 후방에 남겨두고(북한군이 한국 땅을 점령하였을 때 김일성 자신은 은밀히 서울 등 침략 지대를 시찰하였으나 박헌영은 남한 땅에 한발도 못 들여놓게 하였었다), 이승엽을 김일성 자기 대신으로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서울로 파견하였었던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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