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28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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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8월15일, 우리 민족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날을 다시 맞으며 오랜 과거를 회상하면 감개의 정 그지없으며 무궁한 장래를 관망하면 지금 이 순간에 새 운명을 향한 전진의 막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지른다.
우리가 역사상 외적의 침입을 받았어도 일제 36년과 같은 상태에 놓였던 것은 초유의 일이었음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며, 그 뒤 광복을 보았으나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바로 알찬 독립국가로서 발을 내딛지 못한 쓰라림도 여태껏 간직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스스로 겪은 이 현대사의 물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비축하게 되었는가.
오늘과 단절된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미래의 등불이 못되는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에 그런 것이 있을 수는 없다. 역사는 민족의 마음에 따라서 경성도 되고 섭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병록에서 무엇을 얻어 새 처방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우리의 민족사에서 얻은 어떤 가치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시대사조를 가지고 있는가.
지금 거리에는 고도성장을 주장하며 번영을 구가하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궁극의 목표일 수는 없다. 역사상 세계의 부를 모두 차지하고도 패망의 고배를 마신 예는 무수히 있다. 민족에게 뚜렷한 의식이 없어 올바른 진로를 찾지 못하면 거만의 부도 사상의 누각에 불과하다. 약간의 부가 민족의 의식을 마취시킨다면 이는 마땅히 비판될지언정 환영할 바는 못된다.
지금 우리도 물질 면에서 차츰 향상된 생활을 하게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앞으로도 상당히 계속된다는 전망도 있다. 그러나 이에 반비례하여 우리의 의식은 해이·타락으로 치닫고 있다 하여도 과히 지나친 말은 아니다.
물론 이와 같은 풍조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인류의 의식이 기로에 서 있다는 말도 듣는다. 과거의 모든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도덕관념이 뒤집히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도 단순한 과대망상의 현상은 아니나. 그러나 누천년의 도덕률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어 어제의 윤리가 오늘의 부덕이 된다면 이는 틀림없는 암흑현상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신은 단순한 또는 형식적인 법률상의 평등에서 실질적인 경제상·사회상의 평등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서는 보다 높은 윤리가 요구되고 있다. 토론과 요해를 거친 평화적 방법에의 신뢰란 상대편이 이성과 선의로 대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에 호소하는 한편, 자신도 이성과 선의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이런 근본 정신아래서만 민주주의는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자질이 과연 얼마나 갖추어져 있는 것일까.
민족의 번영이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약을 벗어나 물질만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확고한 자아에 대한 의식이 발랄히 작용할 때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보아왔다. 이를 거울삼아 희망과 용기에 찬 밝은 내일에의 거보를 위하여 발돋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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