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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제자 박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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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창발력」의 한계>
1950년1월2일 밤 이날 밤은 나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의 밤이었다. 그것은 내가 수사기관에 포위되었다가 무사히 벗어났다는 기억에서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 이날 밤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로당지하당의 제2인자인 이주하가 평양에 가서 박헌영과 밀의하고 남로당의 중요한 새 노선을 가지고 1월2일 밤 장충동의 어느 집 앞에서 「지프」로부터 내려 돌아온 날이다.
이에 앞서 이주하는 1949년12월 어느 날 남로당 지하당의 총책 김삼룡의 보고서를 가지고 극비리에 월북하여 박헌영을 평양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김삼룡의 보고서는 여러 문제를 포함한 긴 것이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로당이 종전의 정책만으로 이대로 가다가는 큰 위기에 부닥치고 말 것이니 급변하는 경세에 제때에 대응하기 위하여는 서울의 지하당지도부의 창발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삼룡이 여기에 표현한 「창발력」이라는 것은 「독자적인 결정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자적인 결정권」을 달라하면 「독립」하려는 것같이 듣기가 좋지 못하니 「창발력」이라는 문자를 쓴 것이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김삼룡의 보고서를 보이며 김삼룡의 의견을 지지하여 실명하였었다. 김삼룡의 의견이 즉 박헌영의 의견이고 박헌영의 의견이 즉 김삼룡의 의견이기 때문에 서울의 지하당의 김삼룡이 평양으로부터 어느 정도 임기응변의 자결권을 얻는다는 것은 박헌영이 바라는 바이었다.
그래서 박헌영은 이주하에게 『앞으로는 좌익모험주의는 절대로 삼갈 것이며 평양의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책을 취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정책변경이 첫 번째로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이 l950년5월중에 있을 제2회 총선거에 관한 것이었다.
제2회 총선거에 대하는 전술로서는 제1회 총선거에 대한 것과는 달리 「보이코트」를 할 것이 아니라 남로당에 가까운 사람들을 골라서 입후보시킬 것이며 후보자를 세우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차선책으로 중간적 인물 혹은 반 이승만적 인물에 투표하도록 방침을 세워 가지고 왔었다. 이주하는 박헌영이 확실히 언명은 하지 않았지만 「남로당의 한국화」를 지향하여도 좋다는 암시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평양의 김일성은 이른바 「남로당의 북한화」를 위하여 박헌영을 잡아 쥐고 압력을 가하여 왔었던 것이었다. 「남로당의 북한화=김일성화」의 노선이 이남 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느냐하면 그것은 반드시 「좌익모험주의」로 나타나 자멸의 길을 걷게되었던 것이었다. 남로당을 남한 땅에서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남로당의 한국화」 밖에는 그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것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자가 박헌영이고 김삼룡·이주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은 김일성에게 반 김일성 운동으로 오해받기 쉬운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입밖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49년 말의 김일성·박헌영 회담에서 김일성의 태도가 약간 타협적으로 변경된 것을 박헌영은 눈치챘던 것이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태도의 연화에는 두 가지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었다.
첫째 김일성 노선을 남로당에 강요한 결과 남로당의 당세가 날로 약화되었으며 둘째로는 박헌영의 김일성에 대한 태도가 이때까지의 「라이벌」(경쟁자)의 태도에서 제2인자의 자리에 만족하고 감수하는 듯한 태도로 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로당출신의 정치위원 이승엽이 박헌영에 대하는 것보다 김일성에게 대하여 더 경의를 표하며 친근히 접촉하여 왔기 때문에 김일성의 남로당에 대한 의아심이 좀 너그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 당시 공산당의 최고간부로 구성된 정치위원회에서 남로당과 북로당 출신자의 비율을 본다면 2대 3이며, 그 서열은 즉 ①김일성(북) ②박헌영(남) ③허가이(북) ④김두봉(북) ⑤이승엽(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북의 분단상태가 장구화하면 남로당은 남로당으로서 그 본연의 자태와 임무로 돌아가야 할 것인데 김일성은 반대로 1949년 여름 「통일적지도」의 명목아래 남북노동당을 비밀리에 억지로 합당하여 자기가 남로당을 직접 지도한다는 정책을 감행했던 것이었다.
김일성이 「통일적으로 지도」하여봐도 남로당은 강화 발전되지 않고 반대로 계속 약체화되어갔기 때문에 49년 말에 이르러 김일성은 일시적으로 그의 강압적인 태도를 약간 감추기 시작한 듯 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원래 남북한에 걸친 통일적 단일적 정당이 존재하였다 하여도 남북의 분단상태가 장구화하여 서로 다른 정세와 환경이 조성된다면 당을 나누어 그 지역에 적합한 정당으로 변생하여야 할 것임을 김일성은 이것을 억지로 도리어 역행시켜버리고 말았으니 그의 야심이 뭣이며 어떠하였는가는 미루어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이주하가 가지고 온 보고를 듣고 『박헌영은 역시 남로당 지하당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김일성과 대항할 수가 있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달도 못 가서 뜻밖의 일이 생겼다. 그것은 50년의 2월 말께라고 기억된다. 중대하고도 긴급한 지시가 김삼룡으로부터 우리 「블록」에 내려왔었다. 이것은 평양에 있는 박헌영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지시였다.
박헌영이 평양에서 지시를 띄운 것은 이보다 적어도 2주일 전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38선을 넘어 서울과 평양간의 연락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곤란하여져서 긴 시일이 걸렸고 또 우리 「블록」의 정태식과 김삼룡과의 직접적인 연락도 2주일에 한번, 또는 4주일에 한번씩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만큼 공산당 세력이 약화되었고 수사기관의 수사망이 확충되어 위험성이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임위원회의 「레포」선을 통한 연락은 매일 있었으나 중요한 지시는 김삼룡과 정태식이 직접 만날 때 전달되어 비밀을 확보하였던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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