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경림(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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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달에는 특히 좋은 시가 많았던 것 같다. 박희진 씨의『관이 타고 있다』(현대문학)는 그 부제가 말해주 듯 고 구자운 시인을 애도한 시이다. 이 시가 우리에게 깊은 호소력을 갖는 것은 한 불구시인의 불운했던 생애의 선명한 부각, 가령 그의 사회적 실패와 불행했던 결혼, 숙명적인 가난과 남겨진 두 아들 등에 대한 섬세한 디테일에서만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가장 가난한 귀뚜리 보다 더 홀가분하게, 호젓이 묻히고자 그 마지막 관마저 벗어버린 그대의 순백 꼭꼭 묶여 막대 만한 진면목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려 한 아니, 끝끝내 자신도 몰랐을 의지로 말미암아 이제 근대의 삶과 죽음은 궁극의 하나로 꿰뚫어졌음이여>이와 같은 시 전편을 꿰뚫고있는 담담한 생사관,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독특한 경지는 박희진 씨의 다른 시편에서도 종종 내 비치던 것으로 그의 동양적 허무주의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지만, 한 시인의 죽음에 부닥쳐 미적 완성을 얻고있다는 느낌이다.
더구나 그의 장기인 고전주의적 방법은 이 시에 장중한 맛까지 더해줄뿐더러, 과장된 슬픔에 대한 적절한 억제는 흔히 이러한 시에 군더더기처럼 붙는 허풍과 엄살을 말끔히 씻어주고 있다. 이에 비해서 같은 시인의 『술집에서』(세대)는 삶에 대한 작은 환희 같은 것이 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의 진부함과 「매너리즘」의 냄새가 전적으로 감추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다.
박성룡 씨의 『흑난을 보며』(신동아)는 그의 대부분의 시와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시어 또한 평이하면서도 독특한 탄력을 지녔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 시인을 뛰어난 시인으로 꼽는데 우리는 주거하지 않는 터이지만, 때로 이 시인의 경우, 두드러진 일반화·개념화의 경향은 현실생활과 유리된 유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첩경이었다.
이 시에 있어 이러한 약점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니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 의지로 이끌어지는 전체적인 가락이 최소한으로 이 약점을 덮어주고 있으며 이 시가 제시하는 진실과 폭넓은 삶의 지혜도 쉽게 우리에게 공명될뿐더러 매우 귀중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성부 씨의『누가 살고있는지』(신동아)는 시종 격양된 톤으로 <종이의 살결만이 드러날 뿐 페이지의 외로움과 활자의 찌꺼기와 비닐 우산을 받치고 가는 사람들의 어두움만이 보는 냄새날 뿐인>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시의 밑바닥에 깔린 절망과 실의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읽게된다.
그러나 그는 <구름 뒤에 남아 기다리는 뜨거운 햇살도 그 억센 팔뚝도>하는 암시로써 그가 결코 절망과 실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지는 않음을 강변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그의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적 입장은 관념상의 조작이 아님은 명백한 것으로서 무기교적 직소 또한 그에 관한 한 매우 타당한 방법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권오운씨의 『지겟군』(세대)은 문명과 문화의 혜택에서 소외된 인간을 내세워 현실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촌에서 산>을 타던, 그러나 지금은<질금질금 국물을 흘리면서 달려가>는 지게꾼 등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더구나 그것이 시일 때 어떤 선입관에 의해서 표현 자체가 도식화하고 경색할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간략한 표현과 생동하는 사상의 연결로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 최근의 그의 시적 변화는 주목을 끌기에 족한 것 같다.
김종해 씨의 『사랑을 위하여』(문학사상)는 종전의 그의 시에서는 거의 보기 드물 만큼의 강렬한 사회의식의 노정이 눈에 띈다. 이 시에 어둡게 깔린 분노나 원한이 개인주의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조금도 이 시에 있어 손색이 되고 있지는 않다.
개인주의적 입장이야말로 이러한 유의시가 빠지기 쉬운 여러 함정에서 그를 건져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적 내용이나 표현의 폭을 넓히고 또 그 깊이를 더해주고 있는 까닭이다.

<그대 오늘밤에 일어나 인간의 초원 쪽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공기를 가는구나 짓밟힌 모든 것을 지금 이 시각에 용서해 주는구나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분노의 절치와 낙루 속에 일면 타협적 요소를 지닌 너그러움이 엿보이지 않는바 아니지만 그것이 속물주의적 체념주의적 소산이 아님은 시 전편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 명사화하는 미의 개념에 대한 교정으로서도 값질 만큼, 그러한 측면에서도 이 시는 훌륭히 성공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홍신선 씨의 『산판에 가서』(월간중앙)는 무리 없는 시어 구사나 내용 전개에도 불구하고 사회의식과 미의식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부분적으로는 절실하고 훌륭한 표현이면서도 전체적으로 통일을 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좀더 내적 정리를 거친 뒷면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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