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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정태식의 권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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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태식도 나를 반가와 하였으며 나도 반가웠다. 말끔하게 면도를 한 갸름한 얼굴이 좋은 새 양복을 입어서 그런지 싱싱해 보였다. 약간 오시랑 머리에 웃으면 자디잔 옥니가 보이는 것이 아주 빈틈없는 단단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떻습니까?』하고 탈출 후의 상황을 물으니 정태식은 싱그시 웃으며 다만 고개를 끄덕거리며 괜찮다는 시늉을 하여 보였다.
정태식은 성질이 참으로 자상하였다. 나에게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가? 당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는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배려를 하고있으나 계속되는 사고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아 상부에서도 고심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위로해주는 것이었다.
서로 인사말이 끝나자 정태식은 「레포」 이를 다른 방에 가서 있으라고 내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내려 삼켰다. 그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는지. 어떤 임무를 지시할는지 나의 생사에 관한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정태식은 나의 앞에 가까이 다가앉으며 『동무가 당을 위하여 사업하는 것을 상부와 나는 주의 깊게 보고 있었소. 어떠한 곤란한 일이나 남이 싫어하는 일이라도 몸을 아끼지 않고 당을 위하여 전심전력 복무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상부에서도 동무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며 신임하고 있소』하고 새삼스러이 정색을 하여 말을 끌어내었다.
사실 나는 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편집국「레포」가 사고가 나서 보충이 제때에 안될 때는 다른 편집국원은 위험한 원고를 들고 가두연락에 나가기를 싫어하여도 솔선하여 가두연락의 「레포」대신을 한 때도 많았다. 원고를 들고 가두에서 인쇄소의 「레포」와 만나서 전달하고, 또 교정인쇄물을 받아와 가지고 교정을 하여 가지고 가두에서 또 만나서 전해주기도 하였다.
원고의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체포되면 변명할 여지가 없이 편집국「아지트」를 자백하지 않으려면 죽도록 고문을 당하여도 참아내야 한다. 한번은 체포당한 「레포」가 수사기관에 편집국「아지트」를 댄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 왔었다. 편집국「아지트」는 벽이 이중 벽이 되어있어 그 안에 자료를 감추어 두었는데 수색을 당하여 그 자료를 다 잃게되면 원고작성과 편집에 큰 지장이 되는 것이었다.
수사기관의 습격을 당하기 전에 편집「아지트」에 가서 그 자료를 구출하여 가지고 와야할 것인데 아무도 자진하여서 죽음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책임자도 얼른 지명을 하지 못하고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자진하여 일어섰었다. 『1초라도 빨리 가서 자료를 구출해 가지고 오겠소』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편집국「아지트」로 달려갔었다.
편집국「아지트」의 2층 계단을 올라갈 때 「도어」를 열 때 벽에 특수장치를 한 판자를 밀고 자료를 끄집어내어 책보에 쌀 때, 그것보다도 이불보같이 불룩해진 보따리 두개를 양쪽 손에 들고 대낮에 종로 큰길을 걸을 때 이때 체포되면 번명할 여지도 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편집국「아지트」에 나오지 않은 정태식은 모르는 줄 알았더니 정태식 뿐만 아니라 김삼용까지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이때 비로소 알았다. 이 말을 듣고 나도 약간 감격하여 『아뇨, 제가 뭘 한 것 있습니까』하고 고개를 흔들었었다. 『동무는 어떠한 곤란이라도 극복하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동무를 당 중앙상임위원회에 발탁하여 나를 보좌하는 부책으로 임명할 것을 강부동무에게 상신 하였더니 상부동무의 비준이 내렸소. 이 지위에는 중앙위원이라야만 될 수 있는데 우리 당은 46년이래 당 대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동무같이 우수한 동무를 정식으로 중앙위원으로 선출하지 못하였소』하며 정태식은 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엄숙한 빛이 돌며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결사대를 적의 화점에 돌격시키려고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의 얼굴과 같이 살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제는 죽는구나. 김장한도 권태섭도 체포되었다. 그 후임인 유축운도 체포당하고 말았다. 김장한과 권태섭은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유축운은 지금도 곤란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상부인 정태식의 안전과 자기가 담당하고 있던 각부의 「아지트」와 간부들의 안전을 자기의 생명으로써 지키고 있다. 내가 이 직책을 맡아 몇 달만에 체포되어 혼날지 모른다.』 김삼용과 박헌영의 얼굴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박헌영, 그의 단단하고 표범과 같은 얼굴 앞에 나는 비겁하게 뒷걸음을 칠 수는 없었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어느 덧 정태식에 못지 않게 엄숙한 얼굴로 되어 정태식의 눈과 부딪쳤다.
『이 직책은 가장 중요한 자리요. 중앙위원이라도 여간 우수해 가지고는 이 자리에 등용할 수 없는 자리요. 나는 동무가 이 직책을 훌륭히 맡아 내리라고 믿소』하며 정태식은 그의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의 내민 손을 받아 굳게 쥐었다. 정태식의 얼굴에 미소가 비로소 나타나는 것을 봤다.
가을이라 응접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날이 저물어져왔다.
우리는 서울운동장 뒷길을 돌아서 동대문을 지나 서울대학문리대 앞을 거쳐 동숭동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 길이 처음이었었다. 그때 처음으로 정태식을 따라 채항석의 집으로 갔었다.
아래층 안방으로 들어갔었다. 정태식은 채항석 내외를 불러 나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이 선생은 김진국이라는 선생인데 우리 당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생의 한 분이니 나를 대하는 것과 같이 대하여 주시오』하고 그들 내외에게 소개하여 주는 것이었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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