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기행 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중공은 의외로 개방적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이방인의 시선을 별로 가로 막으려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의 감옥』으로 불리던 「죽의 장막」은 서서히 그 「커튼」을 걷어올리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중공의 곳곳을 방문했던 한 한국부인의 기행문(본지에 연재 중)은 더구나 그런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중공의 안내인은 오히려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방문객에게 물을 정도이다.
「스케줄」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하는 북한과 같은 공산체제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역시 소련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그곳을 다녀온 한국인들의 기행문을 보아도 한결같이 그런 훈풍을 느낄 수 있다. 그 사회의 내면과 외국인의 시선이 그렇게 단절되어 있지 않다. 시민들과 마음대로 만나서 잡담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래도 뒤에서 툭툭 등을 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조류의 맥락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공산주의체제가 자본주의체제를 이해하는데는 많은 공동을 내포하고 있다. 역시 이쪽에서 공산체제를 바라보는데도 그런 허점이 많다. 이것은 상호를 부정하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바야흐로 상호긍정의 분위기를 추구하고 있다. 「개방」은 그런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슬기로운 세계의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시켜 유지함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공이 「닉슨」·「브레즈네프」·「퐁피두」등 미·소·불의거두회담이 분망한 가운데 핵폭실험을 감행한 것은 스스로 개방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중공엔 아직도 깊은 침묵과 음모의구석이 남아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끝도 없이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개발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 모든 국가의 아픈 상처에 일부러 소금을 뿌리는 심사와 비교할 수 있다.
핵 외교는 부도덕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사회에서나 그 위력을 갖는다. 핵의 힘을 공연히 과장하는 것은 자신의 부도덕을 스스로 과시하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들이 그 핵무기를 모두 두려워한다면 핵 외교는 더욱 더 강화되고 포악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황에선 한낱 「돈키호테」의 무용이 되고 만다.
지금 세계의 이성은 그런 무용을 별로 평가하지 않으려 하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만일 핵만이 지배하는 시대였다면 미국은 벌써 인도반도를 초토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인의 양식은 그런 상황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최근 미·소는 상호 핵 감축에 합의를 굳혀 가고 있다.
이것은 상호부정 아닌 상호긍정의 원리에서 비롯된 개방정치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새 질서를 거부하는 중공의 핵력은 무엇을 의미할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