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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평화 외쳤던 존 레넌의 마지막 외침 “I’m shot!”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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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호 24면

뉴욕 맨해튼 센트럴 파크에 있는 존 레넌 추모 명판 주위에 팬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추모 단지 조성을 도운 121개국 명단이 적힌 비석에는 대한민국의 이름도 보인다. [사진 조현진]

1969년 8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록 페스티벌의 대명사 우드스탁은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공식 명칭은 우드스탁 음악 예술 축제(Woodstock Music and Arts Fair)로, 줄여서 우드스탁 페스티벌 또는 그냥 우드스탁이라 불린다. 한국에서도 젊음, 자유와 로큰롤을 추구하는 공간 이름으로 ‘우드스탁’이라는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이 록페의 인지도나 인기를 대변해준다. 자유와 평화를 외치고 음악과 춤이 하나가 된 이 20세기 최대 규모의 로큰롤 축제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이 록페가 뉴욕주 우드스탁에서 개최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축제는 우드스탁에서 남서쪽으로 70㎞ 정도 떨어진 베설(Bethel)에서 열렸다.

미국 팝의 원류를 찾아 ⑦ㆍ끝 존 레넌이 쓰러진 뉴욕

아직도 들리는 우드스탁의 함성
우드스탁이 우드스탁에서 열리지 못한 사연은 이렇다. 공연기획자 마이클 랭을 비롯해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기 위해 의기투합한 4명은 ‘우드스탁 벤처(Woodstock Ventures Inc.)’라는 회사를 차려 뉴욕시에서 북으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우드스탁에 영리 목적의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대규모 록페를 추진했다. 우드스탁은 당시 밥 딜런 등 많은 아티스트가 활동하던 지역으로 이미 대중음악에서는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규모의 공연을 수용할 부지를 찾지 못하자 이들은 새 후보지로 월킬(Wallkill)을 힘들게 찾아 낙점한다. 하지만 이마저 히피들의 폭력적인 소동을 우려한 주민 반대로 공연을 불과 한 달 앞둔 7월 15일 수포로 돌아간다. 이때 인근 베설에서 모텔을 운영하던 한 청년이 마이클 등을 베설로 끌어들였고, 이들은 여기서 만난 축산업자 맥스 야스거 소유 74만 평 규모의 농장을 개최지로 최종 결정한다.

이들은 언론 등을 통해 우드스탁에 대한 홍보가 이미 상당히 진행돼 록페의 이름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고 이 기념비적 행사는 결국 우드스탁의 이름으로 열리게 된다. 당시 베설의 인구는 고작 2366명. 이 작은 마을에 무려 45만여 명이 모여들어 대중음악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렸던 베설의 목장 지역에 세워진 우드스탁 기념비.

이 기념비적 장소에 우드스탁을 기념하기 위한 ‘베설 우즈 박물관(The Museum at Bethel Woods)’이 2008년 개관됐다. JFK 대통령과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베트남 전쟁 등 혼돈의 60년대 상황이 결국 대중음악에서는 우드스탁이라는 결과로 폭발한 만큼 이 박물관은 단순히 우드스탁만이 아닌 60년대 사회상을 함께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드스탁이 무조건 시대를 대변한 최고의 축제였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우드스탁이 과연 오늘날 로큰롤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방문객이 스스로 답변을 찾도록 하려는 세심한 기획이 엿보였다.

개관 이후 우드스탁에 출연했던 아티스트도 많이 찾아왔다. 무명으로 무대에 올랐다 스타가 되어 내려온 산타나(Santana)는 당시를 떠올리며 감동에 눈물을 펑펑 쏟았고, 공연 때 임신 중이었던 조앤 바에즈(Joan Baez)는 이제 중년이 된 당시 뱃 속 아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우드스탁 첫 출연자였던 리치 헤이븐스(Richie Havens)는 올 4월 22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평소 그의 유언을 존중해 우드스탁이 열렸던 장소에 비행기를 통해 유해가 뿌려졌다. 우드스탁 측은 69년 당시 공연이 끝난 8월 18일에 맞춰 그의 유해를 뿌렸는데 역사적인 공연의 첫 아이콘은 결국 역사적인 공연의 마지막 날 한 줌의 재로 우드스탁을 마지막으로 찾게 됐다.

박물관 옆으로 실제 공연이 열린 시원한 공간에는 우드스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우드스탁에 참가했던 서른 두 팀의 아티스트가 모두 적혀 있다. 존 서배스천(John Sebastian)의 이름이 ‘Sabastian’으로 틀리게 표기된 점이 늘 화제다. 이곳을 성지순례라 여기며 찾아오는 로큰롤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은 우드스탁이 남긴 메시지를 아직도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로큰롤 전성기를 이끌었던 라이브 클럽 CBGB. 지금은 패션 매장이 됐지만 분위기는 여전하다. / 비틀스가 미국 TV 방송에 데뷔한 에드 설리번 쇼가 열렸던 곳. 지금은 데이비드 레터맨 쇼 녹화장이다.

새 역사 쓴 뉴욕 CBGB
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내며 로큰롤 역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라이브 클럽 CBGB(정식 명칭 CBGB-OMFUG)는 빠질 수 없는 뉴욕의 로큰롤 아이콘이다. 73년 문을 연 CBGB는 ‘Country, Bluegrass, and Blues’의 약자로 처음에는 이런 장르의 음악을 지향했지만 이 클럽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이름과는 전혀 다른 음악 장르인 펑크와 뉴웨이브 때문이었다. 라몬스(Ramones), 블론디(Blondie), 토킹헤즈(Talking Heads) 그리고 텔레비전(Television)과 같은 개성 풍부한 뉴 웨이브 장르의 개척자들에게 CBGB는 사실상의 고향이었다. 이곳은 무명 아티스트들의 실수를 질타하기보다 실수가 스타일로 발전하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신생 IT 벤처기업들에 실리콘밸리가 있다면 로큰롤에는 CBGB가 있었던 셈이다.

CBGB는 경영난으로 2006년 10월 15일 문을 닫게 되는데 마지막 공연은 이곳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장식했다. 공연장을 인수한 한 유명 남성 패션업체가 2008년 매장을 개장했는데 CBGB 전성기 당시 벽에 남은 포스터와 낙서 등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살리며 당시 로큰롤 분위기를 최대한 보존해 매장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입구에 걸려 있던 천막 기둥은 오랫동안 CBGB의 심벌이었는데, 처음 설치됐던 것은 오래전 도난당했고 80년대 후반 설치돼 문 닫을 때까지 사용된 천막 기둥은 연재 2편에서 소개한 클리블랜드 소재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에 옮겨져 전시 중이다. 뉴욕시는 CBGB의 로큰롤 유산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부터 연례 CBGB 음악영화제를 개최해 로큰롤의 새로운 한 장을 개척한 이 작은 라이브 클럽에 경의를 보내고 있다.

비틀스 미국 데뷔 무대, 에드 설리번 쇼
64년 2월 7일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른 비틀스는 이틀 뒤인 2월 9일 역사적인 그들의 첫 미국 TV 방송 에드 설리번(The Ed Sullivan) 쇼에 출연한다. 당시 미국 내에서 7300만여 명이 이 방송을 본 것으로 추산됐는데, 당시로는 역대 최고 기록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서곡이자 로큰롤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한 장면으로 기록된다.

비틀스는 이날 방송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모두 맡았는데 이는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의 아이디어였다. 첫 곡으로는 ‘올 마이 러빙(All My Loving)’을, 마지막으로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 등 모두 5곡을 라이브로 불렀다. 에드 설리번 쇼에 두 차례 더 출연한 뒤 비틀스가 영국으로 떠난 2월 22일, 비틀스는 더 이상 같은 비틀스가 아니었고 로큰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로큰롤이 아니었다.

48년부터 71년까지 20여 년간 진행된 에드 설리번 쇼는 비틀스 이외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롤링스톤스 등 뮤직 비디오 시대 이전의 로큰롤 스타들을 TV에서 만날 수 있는 대표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녹음한 극장은 68년 프로그램 시작 20주년을 기념해 이름을 아예 에드 설리번 극장으로 개명했다. 지금은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인 데이비드 레터맨 쇼(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의 녹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국가사적지로 지정됐을 정도로 대중문화에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스트로베리 필즈
뉴욕 맨해튼의 중심 공원인 센트럴 파크에는 비틀스 해산 이후 영국을 떠나 이 도시에 살던 존 레넌(John Lennon)을 기리는 아담한 장소가 있다. 존이 숨진 지 5년 뒤인 85년 10월 9일 그의 45번째 생일을 맞이해 뉴욕시가 작은 추모 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로 명명됐는데 존이 쓴 비틀스의 곡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 이름을 따왔다. 뉴욕시는 추모 단지 조성을 도운 121개국에 감사를 표시하는 작은 명판도 세웠는데 대한민국의 이름도 보인다.

추모 공원의 중심 바닥은 원형 모양으로 조성됐고 그의 대표곡인 ‘이매진(Imagine)’ 노래 제목이 중앙에 새겨 있다. 오후가 되면 팬들과 음악인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한마음으로 존과 비틀스의 노래를 부르는데 존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발 디딜 틈도 찾기 어렵다.

존 레넌은 쓰러지고
스트로베리 필즈가 조성된 곳 길 건너에 다코타(The Dakota) 아파트가 있다. 80년 12월 8일 늦은 밤 10시 50분, 이 아파트에 살던 존 레넌이 집에 들어가기 위해 리무진에서 내린다. 뉴욕 소재 레코드 플랜트(The Record Plant) 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을 마친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내 오노 요코가 먼저 내리고 이어 존이 내렸다. 이때 인도에 서있던 마크 데이비드 체프만이란 이름의 청년이 들고 있던 38구경 리볼버 권총에서 5발의 탄환이 발사돼 4발이 존을 맞혔다. 로큰롤 역사상 가장 주목받은 밴드의 핵심 아이콘의 삶이 순식간에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살아생전 ‘사랑’과 ‘평화’를 외쳤던 존 레넌. 그의 입에서 마지막 나온 한마디는 “나 총 맞았어! (I’m shot!)”였다.



조현진 YTN 기자아리랑TV 보도팀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며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특파원을 역임하며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아시아 소사이어티 한국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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