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첫 소련입국 한국인 유덕형씨 기행문|유덕형(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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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백야』를 연상할 만큼 「모스크바」의 밤은 짧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첫날 저녁 「볼쇼이」극장에서 「발레」를 보고 나왔을 때가 밤10시쯤이었는데 아직도 땅거미가 지지 않았다.

<밤 짧아 새벽2시면 훤해>
그뿐 아니라 새벽에도 2∼3시만 되면 벌써 훤히 동이 트이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낯선 땅에 와서 긴장된 데다가 밤까지 길지 않으니 나는 「모스크바」에서 지낸 여섯 밤을 하루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의 밤이 북극지방의 본격적인 백야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캄캄한 밤은 하루 중에서 서너 시간 밖에 안 되는 듯 했다.
「모스크바」의 밤거리는 세계적인 대도시 쳐놓고 어두운 듯 했다. 높은 데서 시가를 내려다봐도 「네온사인」이란,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넓은 거리의 가로등도 수은등인 듯 했으나 촉광이 낮은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모스크바」의 야경은 흥청거리는 인상이 아니고 조용하지만 적막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밤을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보내는지…. 서구와 같은 향악적인 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즐길만한 별다른 오락도 없는 듯 했다. 여흥이란 원래 여유에서 오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검약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그런 것이 발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밤에는 연극·영화에 관객들이 몰리고 낮에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듯 했다. 「호텔」방에서 「텔리비젼」을 틀어봐도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개가 연극이나 「발레」등을 극장으로부터 직접 실황 중계하는 것 같았다.
첫날 공항에서 검은「세단」을 타고 시내로 들어올 때는 차 속의 「라디오」에서 「톰·존즈」의 노래가 흘러나와 일종의 안도감까지 갖기도 했었는데 「텔리비젼」에서는 일체 그런 것이 없었다.
여기 「텔리비젼」은 「채늘」이 4개로 돼있지만 방송국은 하나뿐이라고 했다. 각기 성격이 다른 모양이었다. 「스포츠」중계라도 있으면 들을까 하고 이리저리 돌려봤더니 그런 것도 없었다.
이곳 사람들의 「스포츠」에 대한 열의는 대단한 듯 했다. 매번 「올림픽」에서 소련이 1, 2위를 다투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체력은 바로 국력」이란 말대로 「스포츠」를 크게 장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총회에서 만난 소련대표들과 얘기할 때도 연극이외의 것을 물어보면 시원찮게 대답하던 사람들이 「스포츠」얘기가 나오니까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별로 화제거리가 없는 여기 사람들은 만나면 「스포츠」얘기인 듯 했다. 특히 축구는 이곳에서 미국·일본 등의 「프로」야구만큼이나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축구장 다섯 개가 나란히>
「모스크바」대학을 가는 길에 지나친 「모스크바·스포츠·센터」에는 굉장히 많은 차들이 모여있었는데 안내양은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또 어떤 운동장에는 한 울타리 안에 5개의 축구장이 마치 「테니스·코트」가 붙어있듯이 연달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코트」마다 축구연습이 한창이었다.
정말 대단한 축구열 같았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해봤지만 축구장 다섯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것은 보지도 못했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레닌·스타디움」은 10만의 관중이 들어간다고 했다.
이곳의 「스포츠」는 축구 외에 농구·「아이스하키」·체조 등이 유명하다고 했다. 소련 안내책자에서 「스포츠」난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전국에는 「스타디움」이 3천개나 있다는 것이다.
또 체육관은 3만7천개, 그냥 운동장은 48만5천개나 된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장 중에서 축구장이 8만8천개, 농구장이 11만개라고 했다. 아무리 땅덩어리가 넓다해도 상상도 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길가·시장바닥서도 「체스」>
이곳 사람들이 왜 이렇게 「스포츠」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오락이 없어서 그런지 또는 운동경기를 보면서 정열을 발산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옇든 국가에서는 「스포츠」를 적극 지원·장려하는 모양이었다.
「스포츠」말고는 「체스」라는 서양장기가 이곳에서는 가장 대중화되어 있다고 했다. 지난번 소련의 「스파스키」와 미국의 「피셔」가 세계「체스·챔피언」을 겨뤄 「스파스키」가 지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소련이 계속 선수권을 가졌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길가나 시장바닥에서도 우리네 장기 두는 것보다 더 흔히 「체스」를 두는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뒷골목을 돌아볼 시간이 없어 그런 광경은 보지 못했다.
또 소련에서는 「서커스」가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1주일 머무르는 동안 밤마다 연극을 보느라고 그런 기회도 가지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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