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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식<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창경원 동물원에 가면 세 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있다. 사람들은 그 우리 앞에서는 대체로 입을 다문다. 다만 철부지 어린아이들이『사자야』혹은『호랑아』라고 불러 볼 따름인 것이다. 이 사자의 꿈을 낮잠 속에서 보는 것이 작가일 것이다.
최고냐, 무냐 일 뿐 그 중간이란 없다. 이러한 서두로 조해일의『내 친구 해적』(월간 중앙) 김원일 의『절망의 뿌리』(극작가 비평)를 내세우는 것이 일종의 파장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만일 작가란 처음부터 전달할 것이 전혀 없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작품이란 반듯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본질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비유가 오히려 이 두 작가에게 해가 적을 것이다.
소설이 만일 근본적으로 훼손된 세계에 대한 염증이라면 이미 작가는 독자를 향한 목소리를 상실함이 원칙일 것이다.
이미 훼손된 세계에의 인식이 전제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심화된다면 작가는 작중 인물을 향한 목소리만 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의 논의라면 독자 쪽도 모험이 필요하다.『내 친구 해적』 속에서 세 개의 성격이 등장한다. 4·19라는 환상이 잠깐 현실화되었을 때 가장 흥분하고 들떴던 이 작품「나레이터」인<나>와, 간질병인<예술가 지망생>과 문제의 바다 사나이<해적>이 그 셋이며, 이들은 함께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역사 앞에서 이 세 개의. 성격이 부딪칠 때를 이 작품은<문어>로 상정 화 시켜 보여주고 있다. <나>와 <예술가 지망생>이 인생의 본질을 토론하고 있을 때<해적>은 물 속에서 문어 한 마리를 잡아온다.

<해적>은 몸에 붙은 문어의 흡판을 떼고 칼로 다리를 잘라 초간장에 찍어 우선 먹고는 <나>와 <예술가 지망생>에게 권한다.『간질 장이 예술가는 그러나 받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까지 돌리고 앉았다가 이윽고는 입을 막으며 고꾸라지듯 저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러나 천연히<해적>이 권하는 것을 받아 입에 넣고 씹으며 말하였다.『임 마,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 행동이 바로 진보의 훌륭한 제일보다. 사실적인 태도, 괴롭히는 것이 있으면 제거하고 음식물이라면 먹는 태도, 그게 맛있으면 맛있게 먹는 태도, 그것이 진보의 감각을 기르는 튼튼한 제일보인 거야.』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엔 이러한 논리는 간질병 예술가의 까닭 모를 자살을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돈을 빌리러 온<해적>의 행위를 설명할 수도 없게 된다. 존재론에 빠져 예술가는 자살하고 묵묵히「사실적」으로 산<해적>은 그「사실적」방식대로 산다고 치자, 사이비 진보주의 신봉자인<나>는 그 중간 지대이고 따라서 쉽게 현실에 타협해 버렸다고 치자.
이 세 성격을 두고 만일 우리가 정신의 불굴 성으로서의 높이를 문제삼는다면 간질병 예술가를 <나>와 대면시켜야 할 것이다. 소위「사실적 방식- 괴롭히는 것이 있으면 제거하고 음식이라면 먹는 태도」가 만일 진보주의의 첫걸음이라면 그 진보주의는 의식 없는 동물의 그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그가 공장에서 조직을 만들고 구두닦이를 모아 운동회를 열고 하는 따위, 역시 괴롭히는 것이 있으면 떼 내고 음식이면 먹는 태도로서의「사실적 방식」의 일종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입으로만 진보주의를 떠드는, 따라서 쉽게 타협해 버리는 <나>와 그「사실적 방식」을 대면시킨다는 것은 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만일 간질병 예술가의 순수성이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에 <나>와 대면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면 이 작가는 인생 수업보다 예술 공부가 선행해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진술 속엔 간질병 예술가와의 대면의 요청이 내포되어 있다. 한 마디 더 보탠다면 소설 장치라는 그 관습에 너무 쉽게 젖어 버렸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사자 우리 앞에서 어른이 침묵하는 것은 그 우리를 의식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절망의 뿌리』는 작가가 독자를 향해 전달하려는 그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실 하나로도 그의 존재는 이미 하나의 두려움이다. 작품이 독자를 향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때 그 작품은 다음 두 가지 목소리를 갖는다.
그 하나는 작품이 작가 자신을 향한 목소리이며 작중인물을 향한 목소리가 그 다른 하나이다.
나는 이 작가가 종종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를 발하고 있음을 목격한바 있다. 그럴 때 한 독자로서 내게 불쾌한 것은 그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를 한국 근대사의 어두운 한순간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아마도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미숙성에서 연유했으리라.『어둠의 혼』같은 작품이 특히 그러하다. 이에 비한다면 이번의 작품 『절망의 뿌리』(제목의 비 상징성을 문제삼지 않겠다) 는 실사 아직도 명백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작중인물을 향한 목소리로 씌어졌다는 검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보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략해도 마땅한 허다한「요설」이 구성을 쉴새없이 차단하고 있음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 논이 과연 이 작품에서처럼 과격성을 띄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더 두고 볼일이다.
끝으로 이상의 두 작품과는 매우 대조적인 작품으로 나는 김국태의『불행한 김 일병』(현대문학)을 들고자 한다. 이것은 이 작품이 정통적인 단편 구조의 견고성을 띠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다.
첫째 작자가 독자를 향한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남성의 치밀성을, 셋째는 문체의 견고성을 그 이유로 삼을 수 있다. 특히 이 작가의 문체는『눈물 머금은 별』에서도 그렇지만, 거칠고도 정확한 힘을 드러낸다. 이 구성의 정통성과 문체의 역동성이 만일 주제가 번번이 군 연 생활에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 창경원의 우리 (책)를 연상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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