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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생활비 걱정이 전부가 아니랍니다 … " " 챙기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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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생물학적 나이에서 7살을 뺀 나이가 진짜 자기 나이라잖아요. 이렇게 팔팔한데 집안에만 있으려니 감옥이 따로 없더라고요.” 한 중견기업 해외법인 상무로 재직하다 2005년 은퇴한 강신철(67·용산구 한강로2가)씨의 노후 경험담이다. 강씨는 은퇴 전 노후에 쓸 생활비만 신경 썼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하고 보니 큰돈 쓸 일이 별로 없어 돈 걱정을 과도하게 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정작 어려움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터져나왔다. 시간은 많은데 할 일이 없는 고통 말이다. 젊을 때부터 교회에 꾸준히 다니며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아내는 항상 바쁘고 활기찼지만, 평생 회사에만 매달려 있다 갑자기 손을 놓은 자신은 집에 홀로 남겨진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강씨는 “은퇴 후 1년쯤 지나자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은퇴 자금만 마련하면 노후가 편안해지는 걸까. 江南通新이 만난 시니어들은 “노후 대비는 결코 돈이 전부가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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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 윤은식(67)씨는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민원인 안내 자원봉사를 한다. 직함이 15개인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일한다"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박은영(63)씨는 "복지관에 가면 `나는 젊은 축에 끼니 여러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직장 관두면 갈 데 없다? … 미리 준비하면 하루 해가 짧다

강씨는 “은퇴해보니 국민연금에다 두 아들이 주는 용돈을 합해 한 달 15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경조사비로 50만~60만원, 가끔 후배들 만나 맥주 한두 잔 사주는 것 외에 돈 들어가는 데라고는 아파트 관리비 정도뿐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대출 없는 번듯한 집, 그리고 많지는 않아도 다달이 들어오는 현금이 있기 때문이다.

윤은식씨가 모델로 참여한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공익광고의 한 장면.

 좋은 집에 용돈도 적지 않았지만 할 일이 없는 게 고역이었다. 그는 “집에만 있으니 이유 없이 울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고 했다. 일자리를 찾아나섰지만 여의치 않았다. 강씨는 “블루칼라 출신은 체력만 뒷받침되면 언제라도 하던 일에 다시 뛰어들 수 있지만 우리 같은 화이트 칼라는 일을 찾기가 어렵다”며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주변 사람들 시선과 체면까지 따져야 하니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아주 제한적이었다”고 했다.

 요즘 강씨는 강남구청이 운영하는 시니어클럽에 가입해 시니어 모델로 활동한다. 각종 자격증 시험 감독으로 나가기도 하고, 구청에서 연결하는 주례를 설 때도 있다. 그는 “돈이 필요해서라기보다 나를 원하는 곳이 있는 게 좋아서, 그리고 외톨이가 되는 게 싫어서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들네도 다 바쁜데 나만 쳐다봐달라고 할 순 없지 않으냐”며 “계속 할 일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열린사이버대 행복한 은퇴연구소의 전기보 소장은 “대기업 강연을 간 적이 있는데 400여 명 중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었다”며 “나머지는 은퇴 후 무엇을 할지 계획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 소장은 “한국에서의 은퇴 준비는 재무설계에만 과도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문제”라며 “무엇을 어떻게 하며 보낼지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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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할 곳 없는데 어디로 가나”

 지난해 공직에서 퇴직한 강모(62·서초동)씨도 공무원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비 걱정은 없다.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할 곳이 사라졌는데 마땅히 갈 곳도 없는’ 현실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40년 가까이 매일 습관처럼 가던 곳이 있는데 어느 날 확 없어졌으니 환장할 노릇 아닙니까.” 사교성 떨어지는 성격도 문제였다. 강씨는 “문화센터 같은 곳에 가는 사람이 많다는데 노인네끼리 모여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다”며 “퇴직하고 나선 하루 종일 집에서 TV 보고 책 한두 권 사다 읽는 게 전부”라고 했다.

 “길에서 만난 직장 후배가 어디 가느냐고 묻길래 ‘서점에 간다’ 했더니 부럽다는 거예요. 나쁜 말 한 것도 아닌데 얼마나 화가 나던지…. 건강하고 돈 있어도 할 일 없는 사람에게 은퇴는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예요.” 주변에선 골프나 바둑 등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강씨는 “난 취미생활 말고 일을 했으면 좋겠다”며 “직장 다닐 때처럼 누가 강제로 뭐를 시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생 일 외엔 해본 일이 없으니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령층 일자리는 제한돼 있다. 지난해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65~74세 임금근로자는 대부분(72.3%) 단순 노무 종사자였다. 직종이 이렇다 보니 임금도 높지 않다. 노동부의 2011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65~74세 임금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월 141만원으로, 전체 임금근로자 평균(210만원)에 한참 못 미쳤다. LG경제연구원 류상윤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65~74세 단순 노무 종사자 중 절반 이상이 청소원·환경미화원이나 경비원·검표원이었다”며 “고령화로 65세 이상 취업자 수는 2000년 100만 명에서 지난해 178만 명으로 늘었지만 일자리의 질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부부 갈등이 골칫거리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2년 전 정년퇴직한 김모(65·일원동)씨는 은퇴 전 수필집 출간 계획을 세웠다. 교원연금이 있어 노후자금은 전혀 부족하지 않아 우아한 노년을 꿈꿨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진 거다. 김씨는 “은퇴 전후의 부부 생활은 완전히 다르다”며 “벌써 반 년 가까이 아내와 냉담하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 경험상 진짜 고민해야 할 은퇴 문제는 부부관계”라고 덧붙였다.

 김씨 부부의 갈등은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김씨는 난(蘭) 키우는 걸 좋아하는데, 아내는 집안 어수선하다며 대놓고 싫은 내색을 했다. 김씨는 “내가 취미생활 좀 하겠다는데 투덜거리는 걸 들으니 화가 나고 서운했다”며 “은퇴 전에 잔소리를 듣는 것과는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TV 프로그램은 뭘 볼지, 부부동반 등산갈 때 어떤 옷 입을지 등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의견 충돌이 이어졌다. 김씨는 “내가 일 안 한다고 얕잡아보는 것 같아 괘씸한 맘이 들더라”고 했다.

 그는 “은퇴 전엔 몰랐는데 이 사람이 30년 넘게 같이 산 내 집사람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며 “나만의 소일거리를 은퇴 전에 미리 준비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집에서 너무 오래 부인과 같이 지내지 않았다면 사이가 소원해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공무원 연금과 임대료 소득을 합해 월 500만원 정도가 들어오는 김모(68·강남구 도곡동)씨도 “퇴직 후 아내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며 “동호회 활동에서 술자리가 잦아지다 보니 아내가 불만을 터뜨리더라”고 했다. 그래서 외부 활동을 줄였더니 이젠 세끼 밥을 다 아내가 챙겨주는 ‘삼식이’ 신세가 된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았다. 평생 차려주는 밥상만 받아봤던 터라 스스로 식사 챙겨먹기는 버거웠다. 그는 “아내와 함께 할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며 “노후를 준비할 때 자신의 취미생활 외에 아내와 어떻게 지낼지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인네끼리’ 편견 버리고 하고 싶은 일 찾아야

 은퇴한 시니어들이 낙담만 하고 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금융회사에 다니며 10년간 은퇴 준비를 한 후 53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은퇴 준비 학교인 아름다운 인생학교(경기도 분당) 교장을 맡고 있는 백만기(62)씨도 그런 경우다. 백 교장은 “은퇴 준비로 국립암센터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면서 암 환자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다들 삶이 연장된다면 돈 버느라 못했던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며 “은퇴야말로 평소 소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백씨는 은퇴 후 취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TV 시청이나 박물관·미술관 방문, 스포츠·공연 관람처럼 남이 하는 것을 보는 수동적 취미와 자신이 직접 하는 능동적인 취미다. 백씨는 “연극이나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을 직접 해보면서 좋아하는 걸 찾아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37년간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 2년 전 은퇴한 박은영(63·석촌동)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요일별로 영어·중국어·댄스 스포츠·탁구를 송파구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배운다. 은퇴 후 전래놀이 자격증, 레크리에이션강사 자격증, 숲해설사 자격증을 따 봉사활동도 다닌다. 상담사 자격증도 있어 중·고교에서 심리상담과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교사 시절엔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 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 같아요. 은퇴 후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새 세상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오전 9시에 나갔다 오후 6~7시쯤 돌아와 밀린 집안일을 하면 하루가 금세 지나갑니다.”

 박씨는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무조건 사람을 많이 만나라”고 권했다. 복지관이든 문화센터든 가서 얘기를 나눠보면 다양한 성격과 재주를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거다. 그는 “남자들이 ‘복지관은 늙은이들이나 가는 곳’이라면서 은퇴 후 집에만 박혀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선입견을 가지면 계속 고립되지만 복지관이라도 나가면 ‘젊은 축에 끼니 아직 여러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대기업 종합상사의 미국법인장을 지내다 환갑 무렵 은퇴한 윤은식(67·서초동)씨는 직함이 15개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일한다”고 했다. 그는 복지부의 고령화 정책 모니터링을 하는 ‘노후불패단’ 건강관리팀장을 맡아 노령연금이나 노후 생활에 대한 의견을 내고 있다. 복지관에서 스마트폰 사용법을 강의하고 실버 모델로도 활동한다. 윤씨는 “은퇴 후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며 “시간이 부족해 잠을 하루 대여섯 시간밖에 못 잔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자들이 남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길 권했다. 골프나 낚시모임 등을 하며 자신만 즐기기보다 봉사나 사회참여 활동을 하면 얻는 게 많아진다는 이유다.

 특히 강남에선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니어가 많다. 최송자(71·압구정동)씨는 매일 오전 5시 일어나 교회 새벽기도에 참여한 뒤 집에 들렀다 점심 때 친구들과 만난다. 최씨는 “교회 지역모임과 교회 봉사활동에 참여하는데, 봉사활동을 하다 보면 ‘나도 한몫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대화만으론 부족…부부가 함께 움직여라

 부부가 노후 생활 설계에 서로 버팀목이 돼주기도 한다. 중견기업 전무로 퇴직한 안모(67·양재동)씨는 다가구주택을 구입해 세를 받고 친구 회사에서 재무담당 임원으로 일하며 노후 자금을 대고 있다. 하지만 2011년 막 은퇴했을 땐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일과가 달라지니 비참해지더라”고 회고했다. 그때 손을 내민 게 아내 고모(63)씨였다.

 고씨는 “주변에서 남편이 은퇴하면 부부가 함께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남편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악기를 배우고 싶다길래 당장 색소폰을 사러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연습실에 등록하고 어느 정도 연주가 가능해지자 양로원이나 경로당에서 연주회를 하도록 주선하는 것까지 부인 고씨가 담당했다. 안씨는 “매일 오전 10시쯤 연습실에 가면 아내가 오후 2시쯤 찾아와 함께 점심 먹고 차 마신다”며 “무료 공연에 나설 때면 아내가 항상 동행해 무대매너 등을 조언해 준다”고 했다.

 아내 고씨는 골프를 못치는데도 안씨가 골프연습장에 가면 따라가 얘기를 나눠주곤 한다. 안씨는 “평소에 쌓은 대화 습관이 은퇴 후 부부 관계에 도움을 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은퇴 후 부부가 원만하게 지내려면 첫째 의식적으로 서로 노력을 해야 하고, 둘째 공통의 관심사를 찾고, 셋째 말로 끝내지 말고 활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김성탁·유성운·김소엽·박형수·정현진·심영주·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 자료: 보건복지부·한국노인인력개발원·국민연금공단의 2012년 노후 준비 종합 진단 지표 발췌(가중치 반영해 항목별 배점 조정) 더 자세한 노후 준비 진단은 국민연금 노후설계서비스 사이트(csa.nps.or.kr)의 자가진단코너에서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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