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명 몰린 「메이·네이」 장례식 방망이 두 개로 수라장 수감 9일만에 전염병 가장 병원서 유유히 탈주 『장군』의 시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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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임일장군」좌익측이 붙였지만 별호 「장군」은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47년 1월 시설파견 대총본부가 설치된 이래 그의 손을 거쳐 전국 57개 지부에 배속된 서울대원은 총 9만여명. 이 9만여명은 부리며 실전을 벌여샀으니 군복만 안 입었을뿐 하는 일은 강군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전배기문 「디데이 직후인 5윌1일 좌익측 「메이·데이」식전에 단신 대들어 수라장을 만듬으로써 장군으로서의 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당일 「메이·데이」단원은 우익은 대전천에서, 좌익은 은행 등 대전시청 광장에서 각각 따로 가졌었다.
모인 군중은 대전천이 3천명에 불과한 반면 사람 모으는데 비상한 좌익측의 주최장소인 대전시청 앞은 3만명이 운집, 충남도청 앞길까지 메워 좌익측이 압도적이었다.
넓은 단장엔 민전 충남도위원장 정설수, 민경도위원장 이만빈, 민족혁명당 도지부장 송근우, 농민조직위원장 강창진 등 대전지방 좌익 거물들이 기라성처럼 올라있고 대전경찰서장 윤점학 등 10여명의 무장경관들이 이들의 경호를 맡아 학사로 왔다..
초라한 대전천을 지키다 시청 앞은 어떤가 살피러 나왔다가 잔치집같은 이끝을 본 그는 『「테러」란 자기생명을 걸어야 된다』는 시범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 돌연 행동에 나섰다. 3만명대 1의 조전인 그의 행동은 무모한 기도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앞서 간 많은 부하들에 대한 의리이기도 했다.
무기라곤 저고리 안주머니에 찌른 다듬이 방망이 2개뿐.
임동지가 군주을 헤치고 가까스로 연단 앞에 접근해 갔을때는 민전 도위원장 정운영의 연설이 한참 고조되고 있었다. 『…친일파·민족반역자로 낙인이 찍혀 쫓겨온 서배육이 대전에 와 「테러」를 일삼고 있다…』 는 예의 문들.
임동지는 순간 『이 빨갱이들아…』라고 벼락같은 고함을 치며 단상(높이 1m)에 뛰어들어가 60이 넘은 정을 단 아래로 메꽂았다. 기습을 당한 윤서장이 권총을 뺐으나 이도 발길로 차 버리고 잇따라「카비망」을 들이대는 순경까지 다듬이 방망이로 쳤다. 이어 그 순경이 떨어뜨린 송을 재빨리 잡아채 공포를 쏘아댔다.
눈깜싹할 사이에 감행된 검도 3단의 돌격은 대성공.
「스피커」선 극「테러」단이다라는 놀란 목소리가 윙윙거리고 군중들은 한발자국이라도 멀리 몸을 피하겠다고 아우성을 쳐 식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동으로 80여명(당시 경찰집계)이 깔려 부상했다. 단신으로 3만명의 집회를 뒤엎은 「장군의 시범」이었다.
물론 임동지는 행동 직후 송모 등 잠복형사 3명에게 현장에서 체포돼 대전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됐다.
한편 임동지는 구속된 지 9일만에 교묘히 탈주, 자유의 몸이 됐는데 그의 탈주작전은 식장 기습보다 더 대담한 것이었다.
그가 탈주를 결행한 것은 당시 대전주재 미군 CIC책임자 「매그」가 경찰에다 『반드시 군재에 돌리라』고 지시한 것을 현재의 부인 남신숙여사(당시 국민회 도지부장이었던 남천우 목사 딸)를 통해 알아냈기 때문이다.
남여사는 바로 임동지가 갇혀있는 대전경찰서 보안과 여경으로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 우연히 『군재에 넘어간다』는 박모 주임의 말을 엿들어 이를 애인인 임동지에게 전한 것.
군재에 넘어가면 4, 5년 징역은 에누리 없을 때였다.
임동지는 즉각 탈주를 결심, 방법을 궁리했다. 유치장 철장을 뚫을 수는 없는 일이고 전염병을 가장, 병원으로 이송된 뒤 뛰기로 작정을 했다.
그는 사식을 가져오는 남여사에게 『속이 궁하니 돼지비계를 넣어달라』고 부탁, 양껏 먹고는 찬물을 마신 뒤 배를 내놓고 잤다.
이튿날 아침 거품설사가 나옴과 동시 「이질」이란 소문을 퍼뜨린 결과 즉각 도립병원으로 이송됐다. 우선 유치장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1차작전은 용케 경찰을 속여넘겨 성공, 다음은 본작전이었다.
경관 2명이 배치되어 1명은 방안에서, 1명은 문밖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으나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며칠 뒤 역시 사식을 가져온 남여사를 시켜 총본부에 행동개시를 지령했다. 내용은 『10여명의 대원이 문병인 것처럼 꾸며와 감시순경 2명을 묶어놓을때 병원 앞에 대기시켜둔 「택시」로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방안에 있던 순경은 애인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는듯 곧잘 자리를 비켜주어 이 같은 지시가 가게됐다.
당일 지시대로 과일꾸러미 둥을 사들고 들이닥친 10여명의 대원들은 두 순경 모두 수건으로 재갈을 물리고 병장에 묶어 놓은 뒤 임대장을 대기 「택시」로 유유히 모셨다.
병실 밖 담당순경은 『인사나 하자』는 대원들의 꾐에 빠져 방안에 들어섰다가 변을 당한것이다. 이날 탈주특공대는 윤여구대원(부산서 복지판매사업)이 지휘했다.
병상에 묶인 두 순경은 임동지를 무사히 빼돌린 1시간 뒤 윤동지가 경찰에 전화로 알려주어 그제서야 풀려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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