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의 똑똑 클래식] 비제, '카르멘' 초연 실패 후 교향곡 악보 불태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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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는 파리 음악원 재학시절이자 자신의 17번째 생일이 있던 해인 1855년에 교향곡 제1번을 작곡했다. 그는 교향곡 제2번과 제3번도 작곡했다고 전해지지만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때에 악보를 모두 불태워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제1번의 악보도 파리 음악원의 도서관에서 뒤늦게 발견돼 1935년에야 초연됐다.

17세의 소년기에 작곡한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비제의 제1번 교향곡은 초연 이후 각국의 관현악단에 의해 잇따라 연주되기 시작했고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연출한 발레 ‘수정궁’에서 이 곡을 사용한 후로는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이라는 찬사까지 받고 있다. 모차르트·베토벤·로시니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소박하고 순진한 젊음의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이 곡은 프로코피예프의 첫 번째 교향곡인 ‘고전교향곡’과 비교되기도 한다.

비제가 자신의 교향곡 악보들을 불태운 시점은 그의 마지막 오페라 ‘카르멘’이 초연에 실패한 후 극도의 좌절에 빠졌던 생의 마지막 3개월이었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던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남겨둘 것과 불사를 것을 분류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땀 흘려 빚은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주저 없이 망치로 부숴버리는 도공들의 아픈 마음이 떠오른다.

이처럼 자신이 가치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불사르고 부숴버리는 것을 ‘장인정신’이라고 미화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살면서 때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버리거나 부숴버린 물건을 애타게 찾거나 그리워하는 일도 없지는 않으니 말이다. 하물며 그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면 또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랴.

1875년 3월 3일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코믹 극장에서 초연된 비제의 마지막 오페라 ‘카르멘’은 그에게 처참한 실패를 안겨준 바 있다. 밀수꾼을 비롯한 집시, 비천한 담배공장 여직공들이 등장하고 칼부림으로 시체가 나뒹구는 내용이 그 당시 오페라의 주 고객인 귀족들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르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화나 전설을 각색하거나 귀족들의 유치하고 배부른 사랑 놀음 일색이었던 기존의 오페라와는 다른 소재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공연기법으로 귀족이 아닌 대중으로부터까지 매우 큰 호응을 받게 됐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 오페라 무대에 가장 자주 오르는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카르멘은 초연 3개월 만에 세계적으로 성공을 이룬것이다. 하지만 비제는 그 사실을 알기도 전인 1875년 6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비제의 가장 큰 음악적 업적은 바그너의 음악극이 유럽을 장악해 거의 모든 오페라 작곡가들이 바그너를 모방하던 시기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척한 점이다. “모방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카피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 대단할수록 그 카피는 우스꽝스럽게 된다.” 비제는 그렇게 썼다. 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김근식 음악카페 더클래식 대표 041-551-5003
cafe.daum.net/the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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