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650> | 고정동씨 월남시키게 부인월북 도와 미소공위통역에 고씨넣어 내막정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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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는 많은 특수공작을 했지만 첫작전은 혁신계로 유명한 고정열씨틀 월남시켜 미·소공동위의 통역으로 박은 것이었다. 46년 3월20일부터 덕수궁에서 열린 공위에서 미·소어를 멋대로 구사하며 날렸던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출신고정훈씨 (간남) . 그는 바로 공위직전 평괴에서 소진주군사령부의 통역관으로 있는것을 우리가 당시의 부인 길전무자씨 (일본인· 치과의사)와 협력, 월남을 시킨 사람이다. 그는 평양에 있을때「스티코프」 중장의 총애 (?) 를 받았던 사람.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가 미측 사람이 되어 공위에 불쑥 나타났으니 아마「스티코프」도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구남동지회를 할때의 일이었다. 고정훈씨에 대한 월낭작전은부인 길전씨의 호소가 실마리였다. 동아일보 3층회의실에 간남동지회의 간판을 막 달았을 때 였다. 나를 비롯 몇몇 간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태원합숙소 (일대림조트건독신료) 소속박청산동지와 금창호동지 (간남강서·당시 미CIC릉역콴) 등이 머슴애를 업은 웬부인을 모시고 나타났다. 광목한복에 고무신 차림. 우리나라 사람처럼 꾸민 이 일본여인은 『죽어도 북한에있는 남편을 찾아갈테니 꼭 좀 데려다달라』 는 통사정이었다. 이
이 바로 고정훈씨의 부인길전씨였고 아이는 맏아들 직인군이었다. 또한 모시고온 김창호동지는 고정동씨가 외4촌이라는 설명이었다. 고정동씨는 그때 평양에서 자동차만 타고 다니는등 날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듣고있었다. 김창호동지가 털어놓은 길전씨의 사연은 가슴 뭉클한 것이었다. 길전씨는 해방되던해 11월 먼저 건너온 고정동씨를 찾아나와 서울·부산등지를 헤매다가 시동생 김동지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난것은 길전씨가 신문에 낸 심인광고를 마침 김동지가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김동지등도 고씨의 소식을 전혀 모를때.
길전씨는 이에 실망않고 이북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는 합숙소에 있으면 행여나 남편의소식을 들을수 있을까해서 10여대원의 뒷바라지를 자청하며 눌러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길전씨의 생활은 아무리 날씨가 매서워도 손수 밥을 짓고 빨래도 도맡는등 식모나 마찬가지―. 심지어 장대 양끝에 미제 깡통2개를 매달아 두부장사를 해서 반찬거리를 사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갖은 고생을 사가며 기다려은 보람이 있어 최근 월남한 사람을 올해 남편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되자 『죽어도 찾아 가겠다』며 어떻게나 조르는지 견디다못해 ?과 상의하러 왔다는것이다.
한복 차림을 한것은 배항을하게되면 바로 떠날수있게 미리 갈아입혔다는 것이다(신분 위장책) . 당시는 우리의 운명이 걸린 미·소공동위가 예비회담을 막끝내고 동역을 모집하는등 본회담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외의 비장한 관심이 쓸릴때였다.특히 우리와 같은 각종 사회단체들은·공위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앞날을 좌우하는 비밀흥정이나 벌이지 않을까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만약 미·소어에 눙통한 고정동씨를 통역으로 들여보낼수있다면 공위의 내막을 손바닥들여다보듯 지켜볼수 있다. 』우리는 뛰는 가슴을 누르고 즉석에서 간부회의롤 소집, 부인 길전씨를 월북시키기로 결정했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 아닐수 없었다. 전선지리에 환한김동지는 그길로 길전씨를 책단까지 모셔 월북을 시켰으며 길전씨는 남편고씨를 설득,곧장 월남케했다. 고씨는 해주까지 출장증을 떼 넘어왔다는 것이다. 고씨는 그뒤 통역관시험에 1둥으로 붙어 예상대로 공위에 들어갔으며 우리와 손을 잡고 회담의 경과를 낱낱이 귀띔해주었다. 고정열씨를 데리고 온 사람은 부인이었지만 평남동지회의개가가 아닐수 없었다. 공위에 대한 우리의 정보는 그 누구보다도 신하 고 정확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의 보고는▲남배의 교통·경제관계▲임정의 조직과 정강둥에 관한 자문안(봉정당·사화단채) ▲협의단체의 자격에관한 것등이었다. 공위는 미·소의이견으로 아무런 결론없이 깨졌고 그동안의 합의사항도 그때마다 공동성명으로 나와 근의 보고에 특별한것은 없었지만 미·소의속셈을 남먼저 파악할수 있는것은 큰 소득이었다. 간청 (그때는.이미 평남동지회가 개편됐음)이 한민당·조민당까지 서명한 5호성명 (찬탁단체에 한해 임정수립문제를과섭한다는 요지) 에 끝내 서명않은 것도 『미의 입장은 반대단체라도 교섭대장으로 인경한다는것』이라는 그의 귀띔덕택이었다. 그의 말이 없었더라면 평육도 서명,괜히 반탁단체로서의「스타일」 만 구겼을 것이다.고씨는 공위가 깨진뒤 채병덕참모강의 통역관읕 거쳐 미특수부대 KL0부대장이 되는등 같은 이념을 의해 큰 활약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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