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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제29화 조선어학회 사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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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고공판>
예심판사 「나까노」는 예심종결결정문에서 다시 각개인별 죄목을 열거했다.
『피고인 이극노 최현배 이희승 등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를 한 점은 개정치안유지법제1조 앞단에 해당하고 피고인 정인승이 같은 결사에 가입하여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를 한 점과 김법린이 이 결사에 가입한 점과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정태진이 이 결사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를 한 점은 각각 개정치안유지법 제1조 및 후단에 해당하고 피고인 이극노 이우식 이인이 마찬가지 목적으로 그 목적되는 사항을 실행하는데 관하여 협의하고 피고인 김법린 정태진이 마찬가지 목적으로 그 목적되는 사항을 실행하도록 선동한 점은 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에 각각 해당하고 피고인 이극노 이우식 이인 김법린 정태진의 각 소행은 모두 연속에 걸리는 것이므로 각각 형법 제59조를 적용하여 이극노에게는 결사조직죄, 이우식 이인 정태진에게는 각각 결사목적 수행행위죄 김법린에게는 결사가입죄의 일죄로 하고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의 전기 결사목적 수행행위죄는 모두 개정규정에 정한 형에 가중이 있는 경우에 걸리므로 개정치안유지법 부칙 제10조에 의하여 개정 전의 치안유지법 제1조제1항 후단의 각형에 따라 각각 처단할 범죄라고 생각되므로 형사소송법 제312조에 의하여 공판에 붙인다.』
이렇게 예심종결결정에 따라 기소된 이극노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장현식 등 12명은 함흥지방법원의 공판날을 기다렸다.
또다시 두 달이 지나갔다.
11월 말이 되자 비로소 재판이 시작되었다.
한번에 두 세명, 또는 서너명이 재판소로 불려갔다. 형무소와 재판소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죄수옷 차림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맨발에 일본짚신을 신고 용수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끌려 다녔다.
전에는 재판을 받으러 가는 죄수를 재판소까지 실어나르는 「버스」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것마저 군수품으로 징발을 당했는지 사뭇 걸어다녀야만 했다.
나는 그때 전신이 쇠약하여 함흥 고려병원에 약 4개월 동안 입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흥구치소에서는 이윤재와 한증이 옥사하자 더 이상의 희생이 날것을 우려, 병으로 위독한 사람은 함흥시내 병원에 입원하도록 조치했다.
내가 입원했던 고려병원은 고종성이 원장이었다. 고 원장은 함흥형무소의 촉탁의로 우리를 계속 보살펴 주었다.
나는 10월에 고려병원에서 퇴원, 병보석을 받아 11월에는 서울에 와 있었다.
이극노 장현식 이인 이우식 등이 모두 병보석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11월 말에 재판을 받으러 오라는 통고를 받고 함흥으로 갔다.
이인과 더불어 한 여관에 머무르면서 병중인데도 바둑을 두고 재판날을 기다리며 있자니 재판을 받으려면 아무리 병보석 중이라고 해도 감옥에 다시 들어가야 된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다시 수감되었다.
병보석은 말뿐이지 다시 수감되자 말살되고 말았다.
1944년12월21일부터 1945년1월16일까지 9회에 걸친 공핀이 열렸다. 16일 드디어 「니시따」(서전승오) 주심판사는 문초와 사건의 심리 끝에 조선어학회사건의 최종판결선고를 내렸다.
이극노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6월, 정인승 2년, 정태진 2년.
이상 다섯 사람은 실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김법린 이중화 이현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장현식 등 7명은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의 재판은 일본인 「니시따」 판사의 주심과 2명의 일본인 배심판사로 된 합의제였다.
그때 우리사건의 변론을 맡아준 변호사는 함흥에 법률사무소를 가지고 있던 한격만 박원삼 유태설 등 3명과 경성에서 변호사개업을 하고 있던 일본인 「나가시마」(영도웅장)였다.
우리가 변호사를 세운 것은 동지전원이 합동으로 공동변호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2, 3인 혹은 4, 5인 또는 한 명이 단독으로 세운 일도 있어 이보다 변호사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었다.
다만 우리는 과거 수양동우회사건의 무죄판결을 받은 예로 보아 우리에게도 무죄판결이 내릴 것을 기대, 변호사를 대었었는데 5명에게 적지 않은 실형이 내려져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동우회사건 때 변호사는 공판정에서 간접목적은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역설, 인격을 수양하고 무실역행으로 경제적 실력을 배양한다는 것은 검사가 조선독립을 달성함 이면목적이라 하지만 무죄라고 주장, 무죄판결이 내렸던 것이다.
집행유예를 받은 7명은 곧 석방되었고 실형을 받은 이극노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그리고 나는 기결수가 되어 함흥형무소에 또다시 갇히게 되었다. <계속> (제자 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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