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21년 사랑 … 차 13만대 이스라엘 수출 도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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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운가르 대표는 20년간 한국산 자동차와 선박을 이스라엘로 수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5일 열린 무역의 날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박종근 기자]

1993년 여름. 김포공항 국제선 출발층에 막 도착한 검은 세단 한 대가 전화 한 통을 받자마자 급히 서울 도심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우자동차의 해외영업부 임원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스라엘 시장에 수출은 어렵겠다”며 이날 오전에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자는 전화였다. 당시만 해도 대우를 비롯해 국내 기업들은 세계 곳곳을 누볐지만 불안한 현지 정세 탓에 중동 지역 진출만큼은 내켜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도 물론 한국 기업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1992년 대우차 수입, 양국 교역 물꼬

 1972년 수교가 단절됐다 재수교한 이스라엘과 한국 간 교역 물꼬를 트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다. “반드시 계약을 성사시켜야 한다”며 출국도 취소한 채 차를 돌린 주인공은 아브라함 운가르(67) 탈카르 주식회사·레이 쉬핑 대표다. 그는 6일 서울 남산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21년간 한국 기업들과 거래했지만 이날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차를 돌려 다시 서울까지 간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대우차 임원들을 설득해 자회사인 ‘세계산업’의 이름을 빌려 수출 계약을 맺는 데 결국 성공했다.

 당시 일본과 유럽 자동차가 주류를 이루던 연 15만 대 규모의 이스라엘 차 시장에 대우차가 진출해 연간 1만 대를 파는 디딤돌을 놓는 순간이었다. 대우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시장에 진출한 국내 기업이기도 하다.

 운가르 대표는 21년간 이렇게 대우를 비롯해 쌍용자동차·기아자동차 같은 국내 기업들을 이스라엘 시장에 진출시킨 주역이다. 한국에선 ‘라미’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탈카르 주식회사’는 그간 국내 업체로부터 국산차 13만7000여 대(총 1조6000억원어치)를 구입했고, 선박임대회사인 ‘레이 쉬핑’은 현대중공업 등에 자동차 운반선 25척(총 1조9000억원 규모)을 발주했다.

외환위기 때도 한국 믿어 발주량 늘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운가르 대표는 지난 5일 열린 ‘제50회 무역의 날 시상식’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포장을 받았다.

 운가르 대표가 한국에 갖고 있는 믿음은 각별하다. 그는 “88 서울 올림픽 때 TV에서 한국을 처음 봤는데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쟁 폐허를 딛고 이런 국제 행사를 치르다니 정말 근면 성실한 나라라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92년 사업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이런 믿음은 더 강해졌다. 그는 “일본·베트남과는 달리 모든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역동성이 한국에 있었다. 한국산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다. 90년대 중반께 대우차는 이스라엘로 수출할 자동차 1000여 대가 실린 운반선을 한밤중에 세웠다. 운가르 대표는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안 대우에서 먼저 배를 세우고, 300명이 넘는 엔지니어들을 급파해 밤을 새워 차를 수리해 보냈다. 그날 밤엔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본은 물론 미국·유럽 자동차 업체들이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헌신적으로 차를 고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98년 닥친 외환위기도 운가르 대표의 믿음을 꺾지 못했다. 외국 기업과 자본이 속속 한국을 등지던 상황에서 그는 보란 듯이 현대상선과도 처음으로 사업을 텄다. 국산 자동차를 선박으로 운송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는 “현대상선과의 계약은 내가 98년에 진행한 사업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모두가 ‘한국은 아니다’고 할 때 나는 한국을 믿었고, 투자했고,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국산 자동차 발주량을 되레 늘리고, 구매대금도 선지급했다.

김우중 전 회장과 아직도 친구 사이

 김우중 전 대우 회장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대우차를 이스라엘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후 사업차 김 전 회장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운가르 대표는 “왜 아침에 맺었던 계약을 오후에 파기했느냐”고 물었고, 김 전 회장은 “나는 그 일을 전혀 몰랐다. (대우 정신에) 걸맞지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한 달 후 이스라엘에 있던 운가르 회장에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하자”는 김 전 회장의 초대였다. 그 뒤로 그와 김 전 회장은 아직까지도 자주 연락하는 친구 사이로 지낸다.

 탈카르가 2008년부터 수입·판매 중인 기아자동차는 진출 6년 만에 연 2000대이던 판매 규모를 10배 늘린 연 2만 대로 확대해 이스라엘 자동차 시장(연 15만 대 규모)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7년부턴 현대미포조선소에 초대형급 선박을 발주해 지금까지 17척을 인도받았다. 20년간 함께 사업을 키워온 한국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표창을 받는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 나이에도 뛸 듯이 기뻤죠. 20년 전 이스라엘에 한국 제품을 들여오는 사업을 시작한 건 정말 쉽지 않았어요. 이스라엘로 돌아가면 이 표창을 꼭 내 손주들에게 보여줄 겁니다. 할아버지는 20년간 한 나라를 사랑했고, 그 세월이 모두 담겨 있는 물건이라고요.”

글=조혜경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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