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04) <제자 이지택>|<제28화> 북간도 (24)|이지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사관 소각 의거>
일본 헌병들이 명동 학교와 장재촌 일대를 뒤지는 바람에 한국 독립 기성회의 편집 간부였던 김정은 피신, 화룡현의 대납자에 있는 마진의 집으로 갔다. 5월 초였다. 이 무렵에 마진의 집에는 결사 대장 김상호와 정동 학교의 교사 백유정·지송 등이 와 있었다.
이들이 은거해 있는 동안 명동 학생들이 사방 10리 앞까지 퍼져 경비를 맡아 수상쩍은 자들이 나타나면 즉각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마진의 집에서 이들 필객들이 독립신문·태극기 등 각가지 신문을 계속 내고 있는 동안에 이봉수라는 경성의전 출신의 젊은이가 찾아왔다. 사전 연락이 돼 있어 맞아 들였다. 이들은 폭탄 제조 기술이 있어 일본 총영사관이나 이 밖의 일본 시설을 파괴하는데 쓸 폭탄 제조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거사하기에 앞서 4월3일에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불이 났었다. 그러나 이때는 구제회 사무실과 숙직실·변소 등 부속 건물만 타 버렸다.
불이 왜 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관헌 측도 원인을 몰라 『 「부령선인」들의 짓 같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한달 뒤인 5월4일에 정말로 대화가 나서 총영사관 건물이 폭삭 타 버렸다. 모든 서류가 타 버려 영사관 기능이 아주 마비된 것이다.
사건이 난 뒤 일본 관헌은 아무래도 불의 원인이 방화 같다고 단정, 범인을 잡는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런 중에 변고가 일어났다. 맹호단·결사대 등의 호소와 협박이 있기도 했지만 불이 난 뒤 영사관 소속의 경찰의 하급자 2∼3명이 행방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이 가운데 조두용이 끼여 있었다. 이 조두용이 바로 영사관을 태운 의거의 사나이였다.
조는 분명히 일본 관헌의 한 사람이었으나 독립군 소속으로 일부러 일본말을 배우고 영사관에 취직해 있었던 사람이었다.
내력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두용은 함북 경성 사람이다. 규엄재에서 공부하며 독립·구국의 뜻을 길러 왔다. 거사 2년 전인 1917년3월5일에 명동의 규엄 댁에서 3인 결사대를 결맹 했었다.
즉 윤갑·최기학·조두용의 셋이서 삼국지의 도원결의와 같이 나라 위해 죽을 것을 맹세하여 ⓛ왜적을 토멸하고 대한 독립한다. ②하처·하일·하시를 막론하고 셋은 일심동력이 된다. ③대한 독립 이루고 요·순 정치를 펴 나간다는 강령을 채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 독립의 전망은 아득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왜경의 정보를 얻기 위해 영사관에 스며들어 정탐키로 하고 우선 조두용이 나섰다.
그는 길림에 가서 일부러 일본말을 공부하고 돌아와 영사관의 「끄나불」로 위장하여 취직했던 것이다. 그 동안 조는 자기가 알 수 있는 영사관 안의 기밀을 전부 흘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독립군이 검거 직전에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3·1만세를 부른 뒤 4월5일에 영사관에 불을 질렀으나 부속 건물만이 타 결국 실패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달 만에 다시 불을 질러 영사관을 완전히 태워 버리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때 특히 영사관을 태운 것은 영사관에 있는 독립군에 대한 각종 정보를 무효화하기 위해 독립군 지휘자들의 의견으로 거사한 것이었다.
첫 번째 거사에 실패한 조는 두 번째는 석유 초롱을 지붕 위로 메고 올라가 붓고 불을 당겼다는 것이다.
거사 후 조는 「러시아」령으로 피신해 버렸다. 조는 약 3개월 후 다시 북간도에 들어와 주로 국자가 북쪽 인적이 드문 동불사·「번치꺼우」·백초구·명월구 등 지방의 독립군들과 접촉, 「러시아」에서 무기를 사오는 일을 했다.
어제 말한 조흥렬이 나른 무기는 대개 이 조두용이 가져온 것이었는데 조가 은신해 있는 곳에는 언제고 명동에서의 사자와 연락이 되었다. 조두용은 52년 부산서 사망했다.
한편 최기학과 윤갑도 방화 의거를 전후해서 「러시아」로 망명했다. 사건 관련이 탄로 날까봐 예방 조처한 것인데 이들은 그후 「러시아」의 동포들과 손잡고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이 무렵에 북간도에는 노인단이란 애국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3·1운동 후 일본 관헌의 불법·만행이 흑심한데 대해 항의하는 취지서 수백장을 인쇄한 뒤 자금으로 1만「루블」을 마련, 서울에 가서 조선 총독에게 이를 전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단원에는 이승교 (또는 이성교) 김학영 차대유 안태순 윤용옥 정치윤 등이었는데 이승교는 이동휘의 아버지이다.
또 안태순은 안중근의 숙부였다. 이렇게 노인들까지도 일어선 것이었다. 앞서 말한 최기학은 이상한 인연으로 김홍일씨와 인연을 가졌다.
즉 1924년에 김홍일씨가 북간도에 왔을 때 최세평이란 가명을 사용했다는 것은 말한바 있거니와 최세평은 명동에 있는 동안 최순화 (일명 최순봉) 란 여성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가 되자 그때 명동 사람들은 『같은 최씨끼리』는 결혼하면 안 된다고 반대했는데 이 때문에 가짜 최씨인 최세평이 곤경에 빠졌던 것이다. 최기학은 이 최순화의 오촌이었다. 살벌한 북간도의 한 「에피소드」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