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찬일의 음식잡설] 일본 상륙한 한국식 짬뽕·짜장 … 중화요리도 '한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수프 접시에 익사한다는 서양 얘기가 있는데, 나는 짜장면에 그럴 뻔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술에 좀 취했는데 깨어보니 어느 중국집이었다. 나도 모르게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시키고는 코를 박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얼굴에 잔뜩 묻은 짜장을 주인이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짜장면을 얼마나 좋아하면 그랬을까 싶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스파게티가 아니라 짜장면이다. 고민이 많을 때, 나는 중국집에서 그 음식 한 그릇을 시켜놓고 생각을 정리한다. 젓가락으로 덥석 면을 들어 뻑뻑하게 입에 밀어 넣으면서, 갑자기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곤 한다.

중국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짜장면을 직원 식사로 자주 먹는다. 한번은 서울 서소문의 배재반점이란 데를 갔더니 지배인이 점심으로 곱빼기를 먹는 걸 보고, 그 집을 무조건 사랑했던 적도 있다. 게다가 얼마나 빨리 면발을 삼키던지, 그 멋진 식욕에 그 집 짜장면 맛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스파게티집이나 피자집, 감자탕집 직원들은 자기가 파는 음식을 별로 먹지 않는다. 왜 유독 짜장면만은 물리지 않는 걸까. 혈관에 흐른다는, 인이 박인다고 표현하는 그 음식인 까닭일까.

연전에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갔다. 알다시피 이 도시는 일본 개항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 우리에게도 인기를 끄는 나가사키 짬뽕의 원산지다. 이 요리는 100여년 전 중국인이 처음 만들어 팔면서 나가사키의 상징이 되었다. 차이나타운에 가면 ‘오리지널’ 짬뽕을 맛볼 수 있다. 한국 짬뽕과는 사뭇 다른데, 국물이 우유처럼 부드럽고 맵지 않다. 한국인 관광객이 오직 이 요리를 먹으러 나가사키에 들르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가사키에 한국식 매운 짬뽕이 상륙했다. 홍보 문구를 보니 심지어 ‘한국 고춧가루를 직수입’했다고 자랑하기까지 한다. 일본에서, 중국인이 만들고, 한국에 건너와 히트 친 짬뽕이 이제 역수출이 되고 있다니 놀라울 수밖에.

그런데 이 지역의 몇몇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아는 분은 드물다.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하나는 전통의 베이징식이고, 하나는 뜻밖에도 한국식이다. 베이징식은 ‘카이라쿠엔(會樂園)’에서 팔고, 한국식은 ‘세이코(西湖)’라는 집에서 판다. 베이징의 여름 대표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다. 국물 없이 간단하게 비벼 먹기 좋은 까닭이다. 한국의 짜장면에 흔히 오이를 충분히 썰어 넣은 것도 바로 베이징에서 유래한 것이다. 베이징식은 춘장에 전분을 거의 넣지 않아 짭짤하고 거칠게 면에 비벼진다. 반면 한국식은 전분이 소스를 이루어 목넘김이 좋고 부드럽다. 짜장면 한 그릇에 이처럼 동양 삼국의 역사가 난마처럼 얽혀 있는 듯하다. 어쨌든 나가사키의 두 가지 짜장면 맛은 두루 좋았다.

나가사키에서 먹는 두 가지 맛의 짬뽕, 그리고 역시 두 가지 버전의 짜장면. 이 독특한 병렬(竝列)이 우리 음식 문화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오늘 늦은 점심은 짜장면 아니면 짬뽕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