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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대해부] 4. 퇴직금 따로 연금 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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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직장생활 12년차의 朴모(35)차장. 직장을 네 차례나 옮겨다녀 퇴직금을 1천만원 이상 타본 적이 없다. 더 많은 연봉이나 더 나은 자리를 주겠다는 회사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옮길 준비가 돼 있다. 노후를 퇴직금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다.

朴차장은 대신 은행의 개인연금에 월 20만원씩 붓고 있다.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 준비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만약 퇴직금이 기업연금 제도로 바뀌었다면 회사를 옮기더라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이 줄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부에 따르면 2001년 우리나라 근로자가 한 직장에 근속하는 기간은 평균 5.9년에 불과하다. 평생직장 개념이 엷어지면서 근속 기간도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그래서 나오는 얘기가 퇴직금 개혁이다.

퇴직금에 해당하는 돈을 금융기관에 붓고 고령이 되면 연금형태로 탈 수 있는 기업연금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노무현(盧武鉉)대통령도 10일 "기업연금 제도는 꼭 필요한 제도"라고 말하고 이해 당사자들과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 추진하도록 정부에 지시했다.

▶힘 얻는 기업연금 도입론=퇴직금을 기업연금으로 바꿔야 한다는 방향에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여기에 대통령의 추진지시까지 나왔으니 제도정비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그러나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특히 ▶기업연금 보험료를 누가 부담할 것인지▶강제로 시행할지 또는 선택가입을 허용할지▶연금액을 미리 확정할지 등에 대해 노사간에 의견이 다르다.

또 기업연금 도입에는 큰 전제조건이 있다. 국민연금도 이에 맞춰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대안이 거론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 학설도 다 다르다. 다만 기초연금제로 가야 한다는 방향에 대해서만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모든 대상자에게 지급하자는 것이다. 지급액은 생애 평균소득의 20% 방안이 많이 거론된다. 현재 30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1개국이 기초연금제를 도입했다.

이에 비해 기업연금이 정착되면 현행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 안팎으로 낮춰도 된다는 주장도 있다. 기초연금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행 국민연금 제도를 유지하자는 견해다.

▶국제사회에서도 적극 권장=세계은행.OECD 등은 여러 차례 우리나라에 다층화된 연금제도를 제안했다. 노후에 특정한 연금 하나에만 매달리게 하지 말고 다양한 연금수혜를 동시에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의 국민연금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기초연금으로 바꾸고(1층), 그 위에 직장인을 위한 기업연금을 두고(2층), 모든 개개인이 개인연금을 알아서 들도록(3층) 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3층 구조'다.

우리도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공사연금제도 개선위원회가 발족해 여러 유형의 다층구조안을 마련했다. 지금처럼 국민연금 또는 특수연금 하나로 돼 있는 단층(單層)구조로는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재정악화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벗어나자 정부는 개혁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보건사회연구원 석재은 책임연구원은 "다층방식으로 가지 않으면 국민연금에 몰리는 부담을 덜 수 없는데다 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할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재정부담이 문제=어느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공통적인 고민거리는 역시 돈이다. 예컨대 국민연금을 기초연금제로 바꾸고 재원을 정액 보험료로 충당하면 저소득층은 여전히 보험료를 못낼 것이기 때문에 사각지대가 해소되지 않는다.

물론 세금으로 충당하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현재 사각지대에 노출된 납부 예외자나 체납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노령화가 진행돼 돈 받을 노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국가재정에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노인 1인당 최저생계비(35만원)를 연금으로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10조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근로자가 전체의 47.2%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기업연금으로 바꾼다 해도 일부에게만 적용된다는 한계가 있다. 1천만명에 달하는 국민연금 지역가입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국민연금의 구조가 '3층 구조'로 바뀌면 기업연금에는 못 드는 대신 국민연금액은 크게 줄어 노후 대책에 구멍이 뚫릴 위험이 있다.

국민연금연구센터 이용하 부연구위원은 "기초연금은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므로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라며 "연금제도의 근본 틀을 성급히 바꾸는 것보다 현행 제도를 보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신성식.정철근.김준현.하현옥 기자

▶기업연금=퇴직금에 해당되는 돈을 정기적으로 금융기관에 적립해 퇴직할 때 연금으로 받는 제도. 회사가 망하더라도 근로자는 금융기관에서 안정적으로 연금을 받을 수있는 장점이 있다.

▶기초연금=평균 소득의 60%를 연금으로 지급하는 현행 국민연금 제도와 달리 노후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장하는 제도. 모든 가입자에게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세금이나 보험료로 재원을 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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