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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피 어린 산과 언덕(4)|김일성 고지전투(1)|고지쟁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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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두솔산 전투에서 개가를 올린 후 후방의 홍천으로 나와 한달 동안 휴식과 부대를 재정비한 한국 해병대는 51년 8월말부터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 이번에는 「펀치볼」북방의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 공격에 나섰다.
공산군은 휴전회담중의 전선소강 상태를 틈타 천연의 요새지인 924와 1026 두 고지에 철통같은 방어진지를 구축해놓고 이를 「김일성·모택동 고지」라고 명명, 이 두 고지에서 두솔산 전투의 패배를 설욕한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전 전선의 전황에 크게 영향>
이 고지를 그들 「수령」이름을 따 붙인 것을 보아도 공산군이 꼭 이 지점을 사수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이 두 고지는 「펀치볼」을 둘러싼 북단능선에 가로놓인 주봉들인데 이 일대를 점령하면 지금까지 피아 간에 정찰전만 반복하던 만대리 분지를 장악할 수 있음은 물론 중동부 전선의 아군전세를 크게 호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의 쟁탈전은 중동부 뿐 아니라 전 전선의 전황에 큰 영향을 주는 중대한 전투였다. 험악한 산악인데다가 인위적인 요새를 구축해 논 이 두 고지의 공격을 두솔산 전투의 산악전에서 명성을 떨친 우리 해병대가 맡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우리 해병대는 4일 동안의 치열한 백병전과 수류탄 전을 전개하여 결국 이 고지들도 완전 점령했지만 연대장 김대식 대령이 부상을 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다음은 김일성 고지 혈전에 참전했던 지휘관들과 사병의 이야기.
▲김동하씨(당시 해병 제1연대장=중령·예비역 해병중장·현 한국마사회 회장·53)

<우리 해병1연대는 두솔산 전투를 마친 후 51년 7월 17일 홍천 북방 철정리로 나와 전진을 씻고 부대를 재편성한 8월 29일 「캔저스·라인」에서 미 해병대와 진지를 교대,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의 공격태세를 갖추었읍니다.
이 두 고지는 소위 최강부대를 자처하는 북한공산군 제3군단 제1사단 제3연대가 참호를 이중 삼중으로 구축해 뚜껑까지 만들어 덮어놓고 사수를 다짐하고 있었어요.
8월 31일 공격 개시선인 월산령에서 부대장 김윤근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가 주공부대로 나서 공격을 시작했읍니다.
이날 대대진두에 나갔던 김대식 연대장이 적이 매설한 지뢰를 밟아 부상하는 바람에 부연대장인 내가 연대장이 돼 전투를 지휘하게 됐어요. 처음 이틀동안의 공격은 미군지원 야포의 오발로 우리 사병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했고 이 때문에 사기가 크게 저하된 데다 적의 저항이 아주 완강해서 실패하고 말았어요.
지휘관들은 사병들에게 8부 능선까지 올라가 붙으라고 불호령을 내렸지만 비가 퍼붓는 악천후에다 적의 저항이 워낙 세니까 도저히 안되더군요.
이 전투는 우리 해병대가 산악전에서 최후까지 승리를 거두고 나가느냐 못 하느냐 하는 운명(?)을 걸다시피 한 것이어서 지휘관들도 소총소대까지 나가 악착같이 독전을 했던 거예요.
8부 능선에 붙기만 하면 자신에 넘친 우리 장병들이 돌격과 육박전을 감행하는데 거기까지가 쉽게 안됩디다.
나는 지뢰 때문에 능선정면으로의 공격은 안되겠다고 판단, 야음을 타고 측면의 좁은 계곡으로 기어올라가 붙도록 했읍니다.
연대 화염방사기를 총 동원해 정면공격을 가하다가 1개 중대 병력을 슬쩍 능선 측면에 잠복시켰어요. 박격포를 냅다 쏴대면서 주공을 정면에서 하는 체 하다가 새벽 여명을 기해 측면에 배치했던 병력으로 하여금 기습돌격을 시켜 김일성 고지를 점령해 버렸읍니다.

<지뢰매설로 정면공격 불능>
이날은 날씨가 갰고 피아 간의 포화로 고지주변의 나무나 숲이 모두 청소가 돼있어 시계가 아주 좋았기 때문에 소총과 수류탄 공격도 용이했지요.
이 공격 전날 밤 나는 김윤근 소령의 호 속에서 대대장·중대장 등을 불러 작전회의를 하는데 정말 속이 탑디다.
그때의 내 심정은 일선 소대까지에 라도 뛰어나가 지휘를 해보고 싶었어요.
김일성 고지 전투 중 나는 전선을 돌다가 적 포탄 파편에 국부를 맞고 실신해 쓰러져 있는 하사관 하나를 봤어요. 깨워서 앉혀 논 다음 긴장을 풀어주려고 『너는 이제 남자구실을 못하게 됐으니 큰일이다』고 했더니 문제없다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합디다.
즉시 후송을 시켜 주면서 치료를 잘 받고 오라고 격려해 보냈어요. 몇 달이 지나 점령한 김일성 고지에서 그대로 방어전을 펴고 있을 때 그 하사관을 만났는데 경례를 붙인 후 대뜸 『이젠 건재합니다. 진해서 치료를 받고 마산에 가 실험까지 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읍니다』하는데 웃음도 나오고 흐뭇한 생각도 들더군요.』
▲김윤근씨(당시 해병1연대 제3대대장=소령·예비역 해병중장·현 사업·46)

<공격시발점인 월산령서 김일성 고지까지는 약 2km가 됐는데 길이라곤 능선을 따라 나있는 오솔길뿐인데다가 지뢰가 무수히 매설돼 있어 정면공격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아침 8시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하오 2시가 되도록 전혀 전진을 못 했으니깐요.
김대식 연대장은 우리 3대대가 진격을 못하자 선두지휘를 하러 올라왔다가 발을 헛디뎌 길옆의 지뢰를 밟았어요. 지뢰가 터지는 폭음을 모두들 적의 포격인줄 알고 엎드렸는데 김 대령과 동행했던 미 해병연락장교 「맥고위」중위가 지뢰를 또 하나 밟아버렸어요.
이때 김대식 대령은 엄지발가락이 하나 끊기고 「맥고위」중위는 복부에 심한 부상을 했어요. 나는 11중대 진지에 나갔다 막 돌아와서 기관총을 그대로 메고 있었는데 총 때문에 빨리 엎드리지 못하고 서서 어물어물한 게 위기를 면한 요행이 됐어요. 나도 재빨리 엎드렸더라면 부상을 입었을 겁니다.
임경섭 소대장이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사병들한테 안 보이려고 얼른 자기 「재키트」를 벗어 김 대령의 얼굴을 가린 후 대원들을 시켜 「핼리콥터」장으로 후송하더군요.
자리가 하나뿐인 「헬」기를 놓고 김 대령과 「맥고위」중위는 서로 『중상자가 먼저 가라. 지휘관이 먼저 가야합니다』라면서 양보를 합디다.

<비통… 우군포탄에 앗긴 전우>
결국 마지못해 김대식 연대장이 먼저 갔는데 「맥고위」중위는 「헬」기가 다시 돌아와 싣고 가는 도중에 죽고 말았어요.
첫날 공격은 이렇게 이래저래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읍니다.
다음날도 김일성 고지 1백「야드」전까지 접근은 했으나 적으로부터 발악적인 측면사격을 받아 철수하고 말았어요.
이날 공격에서 제10중대는 생존대원이 30여명 밖에 안될 정도로 사상자가 속출해 제1대대 1중대로 교체투입해서 전투를 했읍니다.
밤에도 야간공격을 계속했어요. 제11중대와 제1중대가 정면공격을 하는 사이에 강복구 중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를 슬쩍 측면으로 우회시켜 고지정상 30m까지 접근시켜 놨읍니다.
공산군은 이 같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완전히 말려들어 김일성 고지라는 그들의 요새지를 하루아침에 뺏기고 말았지요.
이튿날 아침은 날씨가 쾌청해 정확한 미군 야포와 항공지원으로 적의 측면사격까지 완전 제압하고 9중대의 기습돌격에 뒤이어 모두 김일성 고지 정상으로 뛰어올라 갔읍니다.
김일성 고지 우측 능선에 있던 미 해병대서 측면기습을 위해 계곡 쪽으로 우회해 내려가는 우리 9중대 병력을 적으로 오인하고 야포를 갈겨 20여명의 사상자가 났어요.
관측착오로 우군포탄에 희생된 전우들의 시체를 본 사병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두 울었어요.
정말 비통했읍니다. 미 해병 관측장교가 이 오포격의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회부됐다더군요.>
▲양동익씨(당시 해병1연대 제1대대 1중대 사병=현 제주도 서귀포 전매서장·40)
우리 1중대는 9월1일 주간공격에서 제3대대 10중대와 교대해 들어갔읍니다.

<심야혼전 중 적이 아군을 치료>
미군전투기들의 엄호지원사격을 받으며 이서근 중대장의 진두지휘로 제3소대가 앞장을 서서 공격해 나갔어요.
나는 맨 앞에서 적이 매설해 논 지뢰를 탐지해 흰 종이 조각으로 표식해 놓으면서 올라갔는데 중간까지 접근해도 공산군의 응전이 없읍디다.
이때 바로 뒤에 오던 전우가 지뢰를 밟아 발목이 날아가 버리고 주저앉아 엉엉 우는걸 보니 적개심이 더욱 강렬해지데요.
돌격으로 고지정상 밑까지 올라갔는데 바로 눈앞에 적의 기관총구가 보이는데 아찔하더군요. 엎드려서 호 속을 넘겨다봤더니 적 사수가 꾸벅꾸벅 졸고 있어요. 얼른 수류탄을 까서 집어 던졌더니 적병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내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데요.
나도 그 수류탄을 다시 되받아 공중에 내던지고 총으로 사살해 버렸읍니다.
우리가 고지로 뛰어오르자 피아 간에 일대의 육박전이 전개됐어요.
적병을 부둥켜안고 뒹굴면서 이빨로 물어뜯고 손가락으로 눈알을 쑤셔대기도 했지요.
백병전이 끝난 후 내 뒤의 전우가 옷을 좀 보라기에 만져봤더니 흙투성이의 내 작업복은 피에 흥건히 젖어있더군요.
그제야 나는 부상을 한걸 알았어요. 지금도 내 몸에는 못 빼낸 수류탄 파편이 10여개 박혀 있읍니다.
9윌 2일 새벽의 혼전에서는 적병이 아군을 보고 『동무 부상했다』면서 압박붕대를 감아 준 일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야간 백병전에서는 사투리의 억양이나 눈치로 피아를 구분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지요.
주요일지(1952년 5월 19∼22일)
※19일 ▲정전회담교착계속 ▲휴전회담 「조기」제독, 미 해사 교장으로 전임 ▲서민호 의원 국회결의 따라 석방 ▲소련, 「베를린」과 「뮌헨」간 철도폐쇄
※20일 ▲「미그」기 4대 격추 ▲거제리 포로수용소 폭동 ▲이 대통령, 서울시찰
※21일 ▲B-29, 겸이포·함흥 야간폭격 ▲신태영 국방, 서민호 의원 석방은 무죄 의미가 아니라고 담화발표
※22일 ▲「밴 플리트」장군,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찰 ▲경남도의회 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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