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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제27화>경·평 축구단(19)이혜봉<제자 이혜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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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림픽 예선전>
35년의 제3회 경·평 대항전이 끝나자 그때 4윌19일부터 3차례에 걸쳐 중국 동화 족구대 초청 경기가 거행됐다.
동화 족구대란 낙화 축구단의 후신으로 당시 동양 최강이었다.
극동 「올림픽」에 우승한 것을 비롯해 상해의 만국배 우승, 상해「리그」의「스토어·컵」우승 등 34∼35년에 걸쳐 동양의 무적함대란 별명을 갖고 있던 중국인만의,「팀」이었다.
이를 조선 중앙일보사에서 초청해 왔는데 19일의 1차 전에서 경성학생 선발군은 0-2로 졌으나 21일의 2차 전에서 전경성은 2l1로 이겼다.
이때의 입장권은 지정석이 1원50전, 일반1원, 학생50전이었으니 경·평전의 일반 입장료30전에 비하면 3배가 넘는 큰돈이었다.
그래도 관중은 경성에서만 2만이 넘었으니 이는 당시의 조선 중앙일보사가 선전을 대대적으로 한데도 까닭이 있었다.
그대 조선 중앙일보사는 여운형씨가 주장으로 있었는데 이 동화 족구대가 도착하자 환영음악회를 열고 대회 당일에는 쌍화 비행기가 축하 비행을 했으며 전 경성군이 2-1로 이겼을 때는 호외를 내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조선「호텔」앞에 있는 현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환영 음악회였는데 연전 관현악단의 현제명 지휘, 「바이얼린」의 문학준, 「소프라노」의 최옥기,「테너」의 이유선,「피아노」의 김메리, 경보 합창단의 홍난파, 이전 합창단의 윤성덕 등이 벌인 감미로운「리듬」은 지금도 내 귀에 남아있는 듯하다.
동화 족구대는 경성에서 1승1패를 거두고 평양에 갔는데 전 평양군에는 2-4로 졌다.
당초 예정에는 평양군과 2번 싸우기로 되었었는데 그 이상「게임」을 못한 것은 15명으로 구성된 동화 족구대가 부상 선수의 속출로 더 이상「게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임」을 끝내고 난 후의 조선 축구계는 굉장했다.
동양의 패자라는 이「팀」을 2승1패로 물리쳤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힘과 우악으로 부수다시피 했으니 잔재주를 부리던 동화「팀」 이 부상선수를 내고 줄곧 몰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동화「팀」에는 홍일점의 여명휘라는 여자가 있었다.
주장인 GK 육종??선수의 부인이라는데 당대 상해의 여류 여배우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고 들었다.
국내의 신문기자나 관중들이 호기심으로 그녀를 따라다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때 우리는 축구의 일류선수이면 자기 부인을 동반해 여행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느낌마저 가졌다.
이 동화「팀」과의 친선 경기를 마치고 평축단은 4월24일 처음으로 중국 천진을 원정했다.
전 집필급인 최일씨가 본 난에서 평축단의 천진 원정을 33년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35년부터 37년까지 계속 3년 동안 다녀온 것을 착각한 것 같다.
평축단은 이대 중화「팀」에는 6-0으로 이겼으나 그 전해에 조축단이 0-3으로 졌던 외국인 연합 전 천진에는 4-5, 0-1로 두번 모두 지고 돌아왔다.
이해는 또 36년「베를린·올림픽」이 열리는 전 해여서 각 종목이 예선전을 치르느라고 긴장과 기대 속에 부풀었다.
축구는 조선에서 예선전을 거친 다음 일본에 가서 또「게임」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조선 예선전은 5월14, 15일, 이틀 동안 경성에서 열렸는데 당초 평축 경축 평양 고려 구락부 서울 구락부의 4개「팀」이 출전을 신청했으나 경성군과 평양 군만이 참가하여 14일의 단 한번으로 승부를 가린 끝에 경성군이 1-0으로 이겼다.
이 때의 경·평전이 대항전의 성격이 아닌 첫 대전이었는데 경성군은 후반에 LW 채금석이 결승 「골」을 넣고는 다리가 부러져 입원했다.
이렇게 해서 그해 6월에 일본에서 열리는「베를린·올림픽」1차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는 전 경성이 출전권을 획득했는데 기왕이면 강「팀」을 만들자고 해서 평양 선수를 「픽·업」하기로 했다.
그 결과 당초의 선수단은 ▲감독=현정주 ▲매니저=이영선 ▲주장=이영민 ▲선수=이혜봉 정용수 박규정 김용식 김병희 이유형 최성손 김경한 배종호 박효제 이봉호(이상 경축단) 박형렬 염기순 박인식 이정현 김영근 박의현(이상 평축단) ▲후보=김성간 이치순(이상 평축단)제금석 고홍관(이상 경축단) 등이었고, 조선 축협에서 이인규 권희창씨,「스폰서」로는 경축단의 이사인 배석환씨가 각각 선임됐다.
그러나 이같이 선발을 끝내자 평축단에서는 불평이 많았다.
평축의 우수 선수가 빠지는 등 선발이 불공평하다고 아예 상경하지 않았다.
현정왕 감독과 이영민 주장은 할 수없이 평축단 선수로서 경성에 유학중인 선수와 경축단「멤버」로 선수단을 구성해 5월28일 일본으로 떠나 보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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