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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 <제자 이혜봉>|<제27화> 경·평 축구전 (16)|이혜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축단 천진 원정>
어제 일자의 경·평 대항전 얘기서는 3차 전이 열리지 않은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자 조선일보사에서 신문철을 통해 친절히 그때의 전후사정을 알려주었다. 얘기인즉 우리들 3명이 8일 인천을 떠나 천진으로 향했는데도 경·평전의 결승 전격인 3차전은 8일 오후 경성 운동장에서 열려 평양군이 4-0으로 또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1차전을 평양군이 2-0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2-1로 이겼음도 아울러 알려주었다.
경성군이 3차전에서 4-0으로 크게 진 것은 조축단의 중국 원점으로 중심 「멤버」가 빠졌기 때문일까하고 해석된다.
우리 경신 「그룹」 3명이 인천에서 빠져 나와 경·평전을 하고 있는 동안 인천에 있었던 조축단의 김원겸과 김용식도 필경 경성으로 와 있었다.
천진으로 떠날 조축단의 중심 선수가 모두 경성이나 평양의 선수들이었으니 이들을 데리고 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축단의 천진 원정이 임창복씨의 당시 거금 3백원의 희사로 실현케 됐다는 얘기가 본난 14회분에 나가자 그동안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임창복씨 본인이 나타나 오랜만에 회포를 나눌 수 있었다.
임씨는 그동안 유류 업계에 종사하다가 지금은 은거하고 있다는데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당시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난다.
백명곤 감독의 친구였던 임씨는 그때 영국 계통이 아니라 미국 계통의 「칼텍스」 자매 석유 회사인 「텍사스·오일·컴퍼니」의 천진 지점 판매부에서 월급 1백25원을 받고 있었는데 백명곤씨가 원조를 요청하자 2개월치의 월급을 가불해서 3백원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축단은 4월8일 인천에서 천진으로 떠났다. 이때의 선수단은 단장 임창복, 감독 백명곤, 선수는 GK 이혜봉 (경축), FB 안수한 (평축) 장병오 (평축), HB 김용식 (조축) 김원겸 (조축) 박기윤 (진남포) 김영찬 (평축), FW 채금석 (경축) 최성손 (경축) 강영필 (청진) 배종호 (경축) 임일순 (청진) 하영득 (경축) 등 15명이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이 처음부터 순탄할 리가 없었다. 선수들은 탈 배를 보자 모두가 못 타겠다고 버티었다.
그 배는 중국 산동과 인천을 왕래하던 1천t급의 금강환이라는 화물선이었는데 작고 지저분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화물선이니 객실이 따로 없고 해서 우리는 30명 정도나 들어 갈 수 있을까하는 선원실에서 자고 가야 할 판이었다.
이런 배를 보니 선수들은 기가 차서 원정을 못 가면 못 갔지 안 타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배를 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당시 천진까지의 배 삯은 l인당 13원이었는데 만철을 거쳐 기차로 가면 23원 가량 들었다.
천진의 주최측에서는 체재비와 배 삯을 준다는 조건이었으나 미처 여비는 받지 못한 형편이고 관비는 달랑달랑 했으니 그런 배를 타야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백명곤씨와 친분이 없는 평축의 선수들이 하도 투정을 하니까 나중에는 백명곤씨가 울다시피 설득해서 겨우 배를 탔는데 운수 사납게도 풍랑이 일어 고생이 자심 했다.
그때 이 배는 대련까지 하루, 천진까지 하루걸러 3일 동안 가는데 배가 인천을 떠나 하도 심하게 흔들리니까 군산 출신의 채금석은 원정이고 뭐고 싫으니 군산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고 평축 선수들은 그냥 평양으로 돌아갈 테니 진남포에 배를 대라고 아우성이었다.
김원겸과 더불어 중심 「멤버」인 김용식도 말은 못하고 하도 괴로우니까 담요 한장을 갖고 갑판 위에 올라 참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선수 전원이 토하다 못해 누런 배설물마저 토했으니 얼마나 고생했던가는 말할 나위도 없다.
풍랑은 대련을 지나면서부터는 잔잔해지기 시작해 천진에 들어갈 때는 비교적 괜찮았다.
그래도 3일 동안을 거의 굶다시피 했으니 말들이 아니었다.
10일 당지에 도착해 우리는 천진 반점에서 오랜만에 푸짐하게 먹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런데 다음날은 짐을 챙기라고 하더니 일본 조계 안에 있는 조선인 경영의 유곽촌 근처에 우리를 투숙시키지 않는가.
나중에 알고 보니 대회 주최측은 체재비를 주긴 했는데 워낙 적은 돈이어서 유곽 조합장인 조선 사람이 자기 집을 무료로 내주어서 그곳에 머무르게 됐다는 것이다.
사방이 온통 색씨들 뿐이고 좀 지저분하긴 했어도 돈이 없어 그렇다니까 꾹 잠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은 11일 중국인들로만 구성된 전중화군과 가졌는데 우리는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고 4-1로 크게 이겼고 백계 「러시아」인 「팀」과는 2-2로 비겼다.
이 백계 「러시아」 「팀」도 천진의 서양인 축구 연맹전에서 전승으로 우승한 「팀」이었는데 이를 전반에 2-0으로 「리드」했다가 「타임·업」 10분전에 「페널티·킥」을 당해 2-2로 비겼으니 현지서 우리를 보는 눈은 놀라움과 칭찬으로 가득 찼다.
이때 북경의 보인 대학에서 우리를 초청해 갔다. 보인대는 북경의 우승 대표 「팀」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원생씨가 교수로 있었다.
이곳에서 「게임」을 마치고 나니 서거패누반묘원이라는 식당에서 그곳 조선인들이 축하 「파티」를 열어주는데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곳의 유지로는 김지옥, 고준구, 고강, 송백헌씨 등 10여명이 발기인이 되어 우리를 대접했다고 기억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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