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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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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느덧 추석이 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우리의 명절이 온 것이다.
설날은 설혹 양력과 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간에 차이는 있다 치더라도 만국공유의 명절이요, 크리스마스는 서양에서 비롯한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명절이라고 한다면, 추석은 바로 이 겨레의 고유한 민속적 혹은 민족적 명절이라 해서 괜찮을 것이다. 추석은 정히 우리들의, 우리들만의 명절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멀리 삼국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석은 이 땅위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겨레의 천여년에 걸친 살림을 주름잡고 전래되어온 가장 오랜 잔치이다. 예로부터 사대부 집에서는 추석이외에도 다른 명절을 따로 차려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다른 명절을 차릴 경황이 없고, 오직 이 추석 때만 조상의 묘를 찾았다고 한다. 추석은 그래서 또한 평민적·평등적인 명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하나의 명절을 즐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긴 한해의 판에 박은 일상성의 세계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일상성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가져보려는데 대해 굳이 인색할 필요는 없다. 떠들썩하게 지내건, 고요하게 지내건 혹은 화려하게 차리건 검소하게 차리건 명절의 의미는 일상의 질서 아닌 「다른」질서를 맛본다는 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세계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축으로 하고 돌고있다면 명절의 세계는 사람과 초월자와의 관계를 되살려보고 되살펴보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 초월자는 종교적인 신, 토속적인 신일수도 있고 민족의 영웅, 인류의 성신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집안의 조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바쁘고 어지러운 일상성의 세계에서 잊어버리고 소홀히 했던 이들 초월자를 명절에 다시 되찾아보고 되새겨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추석은 잊어버렸던 조상의 무덤을 살피는 날이기도 하다. 망각의 산등성이에서 자라버린 무덤 풀을 깎고 햇곡식으로 음식을 차려 성묘를 하여 다시 한번 스스로의 근본을 되씹어 보는 날인 것이다. 분수대로 조상을 섬긴다는 것은 그 또한 이 겨레 기천년의 생활사를 뚫고 이어 내려온 자랑할만한 전통이라 할 것이다.
근자에 어설픈 양풍에 휩쓸려 제 근본을 잃고 조상을 섬긴다는 일을 무슨 전근대적인 폐습인 것처럼 푸념하는 소리도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실상 모르는 소리이다. 「유럽」사람들이 도시의 가까운 변두리나 혹은 바로 도시의 한복판에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 공동묘지를 마련하고 얼마나 자주 그리고 정성 들여 그 묘지를 찾아가 가꾸는가 하는 것을 본 사람이면 오히려 우리들이 조상을 섬기는데 「부족」 한 점이 오히려 전근대적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반성되기조차 한다.
바라건대 하루속히 남북간에 자유로운 내왕의 길이 뚫려 월남동포들이 북녁으로 성묘할 수 있는 「인도」가 마련되었으면 하고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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