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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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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미 경제회담
환율문제를 제외하고는 방미 목적을 거의 달성했지만 미국측이 환율에 관한한 한치의 양보도 안했기 때문에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우리대표단은 매일 현지 공관대표들과 전략을 짜기에 바빴다.
당시 주미대사관에는 양유찬대사, 한표욱공사외에 육군무관에 이후낙, 공군에 장지량, 해군에 정기선씨 등이 있었는데 우리 대표단은 거의 5개월간 이들과 합동작전을 폈었다. 미측이 강하게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박사의 귀국 지시전문을 유일한 협상 미끼로 제시, 보따리를 싸들곤 했는데 세번째에는 아주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
회담이 3개월째 지연되던 8월, 우리는 이박사의 귀국 지시를 받고 비행기표를 예약, 닉슨부통령에게 출발인사를 하러갔다.
이상하게도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우리대표단과 단 한번도 만나주질 않았고 항상 닉슨부통령이 우리 숙소인 호텔로 방문해 주고 파티도 열어주곤 했다.
우리가 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닉슨부통령은 제발 가지 말라면서 직접 이박사에게 귀국 연기교섭을 벌이겠다고 나섰다.
과연「닉슨」부통령의 교섭으로 우리는 다시 주저앉게 되었는데 비행기 예약 취소가 큰 문제 였다.
항공사에 달려가 세번째 예약취소를 하겠다니까 직원이 화를 벌컥 내며 도저히 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 미모의 한국 아가써가 벌떡 일어나더니 항공사직원에게 대들었다.
그녀는 대뜸 『항공사라는 게 승객의 편의를 도모해 줘야 하는 것이 제일 큰 의무인데 이분들은 일국의 대표로서 회담이 지연되어 취소를 한다는데 무슨 군소리가 많느냐』면서 호통을 쳤다.
갑자기 지르는 그녀의 높은 언성에 주위의 승객들이 몰려들자 항공사 직윈은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얼른 예약을 취소해 줬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서울에서 E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인과 결혼한 미시즈·베이커여사였는데 4·19직전까지 중동고교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이후 소식은 전혀 모르겠다.
이와 같이 줄다리기 식의 회담이 별다른 진전없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워싱턴엘 왔다.
정총장은 미국방장관 초청으로 미국의 군사시설 시찰을 주목적으로 방미 중이었는데 마침 워싱턴에 들를 일이 있어 잠시 우리와 합류케 된 것이었다.
정총장이 워싱턴을 다녀간지 5일쯤 됐을 때 마우치편으로 지급이라 쓴 정총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때는 이미 정총장이 샌프런시스코에 있을 때였고 그이후에는 일본을 거쳐 귀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총장에게 긴급 전화를 걸어 다시 워신턴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양유찬대사의 명령으로 내가 편지를 뜯어 장거리전화로 정총장에게 편지를 읽어 주었는데 대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공론을 떠들고 있다. 2개 사단장비로 3개 사단을 무장하라느니…중략…
우리가 우믈무물하다가는 점점 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갈 듯하니 속히 귀국하여 서울에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자. 』
영문으로 타이핑 된 이박사의 이 편지는 한마디로 정총장의 긴급 귀국명령이었고 미국과의 협상을 다 집어치우고 우리끼리 뭔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편지가 쓰여진 날짜가 6월20일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일권씨의 방미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이박사가 정씨의 귀국 전일에 임박하여 워싱턴으로 8윌초에야 발송했다는 것이 이상했고 한글이 아닌 영문으로 편지를 썼다는 점이 뭔가 복선이 깔린 둣 했다.
하여간 정총장은 그날로 「워성턴」으로 달려왔고 뭔가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편지소동이 있은 3일 후 우리 대표단이 회의장으로 나갔더니 뜻밖에도 「로버트슨」미수석대표가 『환과 달러의 공정 환율을 5백대1로 제의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면서 종전의 7백20대1 주장을 대폭 양보했다.
「로버트슨」대표의 제의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우리편이었다.
7백20대1에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 버티던 미국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것은 아무래도 이박사의 영문편지와 정일권씨의 워싱턴 활동과 무슨 함수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왜 당시 미국이 그와 같이 대폭 양보를 하게됐는지 확실히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추측컨대 당시 서울거리에는 북진통일이라는 구호가 골목마다 붙어 있었고 이박사가 국가 행사 때마다 외치던 말이었는데 미국 사람들은 이박사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하여 항시 조마조마하던 터였기 때문에 참모총장에게 보낸 단호한 편지에 지래 겁을 먹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로써 3개월 이상을 끌던 환율문제는 5백대1로 타결을 보게됐고 우리 대표단은 이박사의 고자적인 정치술수에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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