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통합에 바친 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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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럽 통합에 바친 그의 노력을 칭송해서 곧잘 「미스터·유럽」으로 애칭 되던 「폴-앙리·스파크」씨가 지난달 31일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그는 세차례에 걸쳐 「벨기에」 수상을 지냈고 여섯번이나 외상직을 맡았었지만 그의 생애를 평가할 업적은 국제주의자로서의 그의 불굴의 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45년 「유엔」 헌장 기초 위원으로서 유엔 창설의 공로자였으며 49년에는 구주 통합 노력의 첫 시도로 발족하게 된 구주회의 의장을 지냈고 뒤이어 구주공동시장(EEC)의 창설을 규정한 「로마」조약문 기초 위원장을 지내고 이 기구의 초대 의장, 북대서양동맹(NATO)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899년 「브뤼셀·오페라」단의 지휘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자며 기질적으로는 평화주의자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신조는 긴장 완화를 위한 범세계적 기구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했다.
그는 미래의 세계는 『위대한 인간의 공동 사회의 시대』로 특정지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한 세계에서 유럽은 한 단위 공동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드골」과 충돌했으며 영국의 EEC가입을 적극 옹호했다. 그리고 「나토」 사무총장 시절 공산주의의 위협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군사적이기보다는 경제적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나토」를 정치·경제적 통합의 매개체로 변질시키려 노력했다.
결국 이 기구의 군사적 역할을 고집하는 고 「케네디」미국 대통령과의 마찰로 61년 2월 사퇴하고 말았다.
세계의 운명을 걱정하는 대 정치가였지만 그는 기지와 유머가 풍부했다.
유엔 총회 의장 시절 그는 곧잘 의장석에 앉아 신문으로 가린 만화책을 읽었다고 한다. 각국 대표들의 상투적인 연설이 지겨웠던 듯-.
그는 69년 6월과 70년11월 「벨기에」 전신 회사인 BTM중역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 한국의 통신 현황을 시찰했다. <뉴스위크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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