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순수문학 외길 故 조병화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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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고독이 전율처럼 지나갑니다./무료한 시간이 무섭게 흘러갑니다./시간의 적막 속에서/속수무책, 온몸이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아, 이 공포,/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고독이 전율처럼 머물고 있습니다.// 그럼."

보통의 우리 삶을 기다림과 고독, 낭만과 사랑으로 노래하며 한 해 한 권 꼴로 신작 시집만 무려 52권을 펴내던 조병화(趙炳華) 시인이 마지막 시 구절로 '그럼'을 남기고 잠들었다.

趙씨는 자신의 시집을 '숙(宿)'이라 했다. 그는 무릇 시는 '영혼이 잠자는 집'이라며 현실은 현실대로 시는 시대로 따로 살다 간, 강팍했던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낭만.순수 시인이었다.

부음을 듣고 부랴부랴 빈소를 찾은 이근배 한국현대시인협회장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잃어 막막하다.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 처럼 누가 읽어도 이게 시구나라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인을 빼앗겼으니 이제 시는 점점 더 꼬이고 어려워지겠구나"하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1월 8일 입원 이후 줄곧 병실을 지켜온 고인의 '수제자' 김삼주 시인은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엔 시'라며 시를 별과 같이 지키는 시인들을 위해 나머지 재산을 다 쓰라 하며 눈을 감으셨다"며 "현실주의.상업주의 시대지만 많은 시인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시의 순수성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 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추억' 전문)

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 아련히 빠져들었을 위 시와 같이 趙씨의 시는 쉬워 그대로 노래가 될 수 있다. 시적 미학이나 현실성을 강조해 난해하거나 팍팍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슴 가득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게 반세기 이상 그의 시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경성사범을 수석으로 입학한 준재인 그는 평탄한 삶을 유복하게 살았으면서도 시 자체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 그리움이 고독을 낳고 허무를 낳는다.

고독과 허무를 노래하면서도 고뇌에 찬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어 趙씨의 시들은 환한 꽃 그림자다. 현실에서는 결코 순하게 합해질 수 없는 꿈과 그리움과 사랑이지만 인간이란 결코 그런 가치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며 시와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집.에세이집 등을 합쳐 총 1백30여권의 저서를 펴내, 꽤 되는 인세 수입을 모두 털어 자신의 호를 딴 편운(片雲)문학상을 만들었다. 벌써 12회째 후배 시인.평론가들의 순수문학 혼을 격려하고 있다. 학창시절 자신도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니 문인 장학금으로 내놓겠다며 그의 저작권과 사재 모두를 순수문학의 제단에 바치고 갔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장남 진형(眞衡.세종대 대학원장)씨와 장녀 원(媛.의사).차녀 양(洋.음악가).3녀 영(泳.화가)씨가 있다. 발인은 12일 오전 9시. 고인의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경기도 안성 난실리 선영. 02-958-9545.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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