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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제26화 경무대의 사계 여록 내가 아는 이 박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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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 일을 하면서>
정부가 수립되면서 처음 나는 국회사무총장으로 일했다.
다음해인 49년6월 이 박사는 나를 김동성씨 후임으로 공보처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중간에 서너 달 쉰 것을 제외하고는 53년 휴전조금 전까지 줄곧 이 박사를 보필했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고 국민의 뜻을 중요시하려고 애썼다. 다만 소신 있는 고집쟁이였고 이것이 독선적인 경향을 나타낸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 수 있었다.
6·25사변이 터져 「마담」이랑 비서들이 빨리 피난을 가야한다고 재촉했으나 이 박사는 이틀간이나 고집을 부리면서 안가겠다고 버티었다.
이 박사는 『내가 시민들을 그냥 두고 어떻게 떠나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마담」과 황규면 비서와 같이 『영영 서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잠깐 피하는 것이니 곧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겨우 동의를 얻었다.
얼마 후 한번은 총리가 모신문의 기사내용에 화가 나서 그 신문사를 폐간하라고 나에게 지시했다. 나로서는 총리 지시였기 때문에 걱정이 컸다.
고민을 하던 중 이 박사에게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 박사는 버럭 화를 내면서 『신문사를 폐간해? 신문은 국민의 입인데…』라고 말했다. 신문이 아무리 정부를 비난했다 해도 민주국가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일본을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경계했다. 한번은 경제사정이 핍박하여 대일차관 문제를 고려해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이 박사는 『이 사람들아 정신이 있어 하는 소리냐』면서 『왜놈 돈 먹는 것은 비상을 먹는거나 마찬가지야, 그자들 돈 먹고 안 갚으면 우리 땅덩어리를 내놓으라고 할걸세』라고 펄쩍 뛰었다.
이 박사는 일본 것이라면 무척 싫어했지만 경비를 줄이는 데는 상관하지 않았다.
경무대 의자 중 일본 국화무늬가 든 것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을 없애면 또 돈이 든다고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경무대에 있는 의자는 평소에 흰 광목으로 커버를 씌워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이것을 벗기고 사용했다. 한번은 비서들이 없어 경관들이 손으로 치우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때가 묻는다고 흰 장갑을 끼고 정돈하도록 지시했다.
또 한번은 경무대 현관이 낡아 비가 샜다. 이 박사는 비만 새지 않도록 조금만 고치라고 했으나 뜯어보니 전면 보수를 해야할 판이었다. 그래서 예산이 많이 초과되자 이 박사는 담당비서를 호되게 꾸지람을 해서 하마터면 쫓겨날 뻔했다.
휴전직전 내가 공보처장을 그만 두었을 때 이 박사는 구황실 고문으로 임명, 전란으로 쑥대밭이 된 문화재를 보수하라고 했다.
그때 경회루는 사변통에 천장이 떨어지고 기동에 탄환이 박혀있는 등 엉망이었다. 아시아 재단의 원조를 받았지만 이 박사는 경비를 아껴 쓰라고 지시했다. 하는 수 없이 인부 이외에 학생 40∼50명을 동원하여 천장의 연꽃무늬 하나 하나를 손으로 그렸던 일이 기억난다.
이 박사는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이 외국 것 보다 훨씬 낫다고 했고 한국인이 잘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참 좋아했다.
불국사 덕수궁의 기동이 기울어졌어도 우리 것이 낫고 일본사람들이 해놓은 것은 장난 같은 것이라고 했다.
외교에는 귀신이라 불리었던 이 박사는 53년 닉슨 부통령이 내한했을 때 직접 이들을 안내하여 고궁 등 고유문화를 둘러보게 했고, 다른 외국손님이 올 때도 꼭 고궁을 관람하도록 했다.
반면에 이 박사는 미국사람들은 돈만 잔뜩 들여 무엇을 만들지만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했고, 중국인은 밀수근성이 있다면서 의심을 많이 했다.
우리 손으로 무슨 기술을 개발한다든지 물건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이 박사는 참 기뻐했다.
내가 대한조선공사 사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미국측은 새 기계를 못 들여오게 하고 자기네들 낡은 배를 사가라고 했다.
이 박사에게 말씀드려 겨우 미국원조를 조금 받아 그 첫 사업으로 해안감시선을 12척 만들었다. 진수식에 참석한 이 박사는 『됐어, 됐어』하면서 『이 처장, 공보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배도 잘 만들어』하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부산피난시절 거창사건이 났을 때의 얘기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면 박사는 서류를 하나하나 모두 검토하는 꼼꼼한 성미였다.
거창사건이 터지자 공보처장이던 나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정부에서 미리 성명을 발표하자』고 주장, 성명초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장 총리는 6일이 지나도 사건을 공개하는 성명을 발표하지 않고 보류해 두고 있었다. 이런 사건이 외국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해서 외신을 통해 먼저 터져 나가고 말았다.
이 박사는 다짜고짜 나를 부르더니 『자네, 어떻게 해서 신문에 이렇게 나게 내버려뒀나』고 문책했다.
사실대로 설명을 드리자 이 박사는 장 총리와 내무·국방·법무장관을 불러들이더니 『이런 국가의 수치가 어디 있나. 장관들 모두 사표 내고 물러가시오』라면서 그 자리서 3부 장관을 경질했다.
이 박사는 이처럼 책임을 물을 때는 가차없이 결단을 내리는 성미였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

<다음은 양유찬 전주미대사의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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