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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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람들이 언제부터 논·밭 가는데 소(우)를 쓰기 시작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옛 사가들은 굳이 이런데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한나라 때부터라고 공자가 밝혔기 때문이다. 공자가 그렇다고 말한 이상 틀림이 있을 턱이 없다. 여기 반론을 편다면 공연히 이단자로만 몰릴 뿐이다.
그런데 감히 공자가 틀렸다고 만한 사람이 있다. 영조 때의 정동유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한서에 의하면, 밭갈이를 하는 데에는 소 한 마리와 사람 세 사람이 맞먹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를 그때부터 사역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가 적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농민에게 가르쳤을 뿐일 것이다. 또 산해경에는 직의 손숙균이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리란 소를 부릴 때 쓰는 경구이다.
정동유는 바로 이점을 들어 공자의 오류를 『감히』지적한 것이다. 학자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꼭 심장이 몸 한가운데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말에 의문을 품은 중세기 서구학자와도 같은 엄청난 이단행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눌려 있던 중세기 서구에서는 과학이 뒤 질 수밖에 없었다..
정동유와 같은 학자의 등장도 서양의 물결이 서너번 있던 다음인 18세기 후반에야 겨우 가능했던 것이다.
어제까지 본지에는 『한국이 낳은 고승10인』이 연재되었다. 이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학승도, 학자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풍요한문화전통으로 남겨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그저 지나친 권위주의로 해서 창조적 에너지가 위축되었기 때문에서 만도 아닐 것이다.
지난달의 학문은 모두가 사대부에 의해 지탱되었다. 사대부란 체제유지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라스웰의 이른바 창조적 긴장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가령 두 학설이 맞섰다고 하자. 사대부에게 있어서는 어느 것이 더 진리에 가까우냐는 것보다 어는 것이 더 체제적이냐는 게 중요했을 것이다.
세조 때의 왕사 수미와 동시대인이던 김시습이 방랑으로 끝난 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까.
이런 병리가 오늘날까지도 아물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학문의 발달에는 또 반드시 무엇인가 인센티브(자극제)가 있어야 한다.
가령 프랑스에선 공식 파티에서 제일의 석차는 「아카데미·프랑세」회원에게 돌아간다. 그 다음에 대사가 않고, 또 그 다음에 「레종·드뇌르」대십자장의 패용자가 앉는다. 우리 나라 이런 대접이 오늘의 학자. 예술가에게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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