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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하늘의 전쟁(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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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10전투 비행대대>(3)
제10전투비행전대가 1951년10월11일의 단독 출격 개시부터 53년7월27일의 휴전조인 때까지 1년8개월 동안에 올린 전과는 괄목할만하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케이스」로서 승호리 철교폭파·평양대폭격·351고지근접지원 등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이 세 전과는 미국이나 그 밖의 세계공군전사에도 뚜렷이 기록돼 있다. 특히 승호리 철교폭파는 특수한 지형에다 적대공포화의 밀집으로 미공군이 5백여회 출격에도 실패, 손든 것을 한국공군이 이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음은 한국공군사에 길이 남을 이 작전에 참가했던 조종사들 이야기.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종사들은 자기는 절대 살아남는다는 투철한 신념과 모든 일에 전력 투구하는 정신자세를 가져야하며 만심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폭탄 4발 명중, 중앙부 절단>
▲옥만호씨(당시 제10전비전대편대장=대위·현 공군참모총장=대장·47) <한국전쟁 때 우리 공군의 실력을 크게 과시한 것이 승호리 철교폭파라고 하겠습니다. 이 철교는 평양 동방 약12㎞, 승호리에서 서북방 3㎞되는 대동강지류인 남강에 놓인 다리였어요. 길이는 한강철교보다 훨씬 짧았지만, 전략상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었지요. 철교를 통해서 동·서·중부전선으로 적 보급로가 뻗어 나갔으니까요. 직격탄이 아니면 폭파하기 어렵게 만들어져있어 미 공군기들이 폭격하다가 성공치 못하고 그 뒤를 우리공군이 맡았어요. 이래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또 우리공군의 능력과 체면이 곁들여 제10전비전대에서 꼭 해치워야겠다는 결의이었어요.
52년1월12일 상오에 김두만 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편대가 승호리에 출격했는데 기상이 나빠 그냥 되돌아왔어요. 오후에는 윤응렬 대위가 제1편대장, 그리고 내가 제2편대장으로 2개편대가 나갔다가 역시 기상불량으로 공격 못했어요. 그러다가 15일에 다시 승호리 철교 폭격작명이 내렸어요. 오전 제1차 출격에는 윤응열 대위의 제1편대와 내가 이끄는 제2편대의 8대가 모두 참가했습니다. 우리편대는 유치곤 대위, 박재호 대위, 손흥준 중위이었는데 강릉기지를 떠나 폭격 제한선을 벗어난 지 5분도 못돼 물개리 서북방에서 적 고사포가 무수히 올라와 비행기 바로 옆에서 터집디다. 기지출발 1시간20분쯤 걸러 나는 목표상공에 이르렀어요. 승호리 「시멘트」공장부근에서 특히 적의 대공포화가 심하게 올라옵디다.
제1편대가 한대씩 급강하하면서 공격을 끝내고 우리 제2편대가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을 때 대공포화는 절정에 달했어요.
그러나 폭격을 끝낸 제1편대가 남은 「로키트」탄과 기총으로 적 화기진지를 때려 우리편대는 예정대로 공격해 들어갔어요.
공격을 끝내고 상승하며 보니까 철교중앙부와 다른 또 한곳에 커다란 공간이 생겼더군요. 정말 통쾌했습니다.
그 이튿날 정찰사진으로 확인된 것을 보니 그날 출격에 나선 8대의 비행기가 떨어뜨린 16발의 폭탄 중 4발이 명중하고 다른 4발도 약간 맞았습디다. 6·25를 통해 내가 절감한 교훈은 조종사들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절대 승리하고 또한 산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물량전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신전력이 우선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공여부 두고 미군선 내기도>
그리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용의주도성과 강인한 정신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군요.>
▲주영복씨(당시 제10전비전대편대장=대위·현 공군참모차장·중장·45) <51년10월 우리 공군이 단독작전을 하기 앞서 그해 8월에 일종의 「테스트」를 위한 폭격비행이 있었어요. 이 시험비행에는 김영환·강호윤·김두만·옥만호·박희동·전봉희·손재권제씨 등과 나, 이렇게 12명에다 미 고문관 2명이 따라 갔어요. 해주북방의 철교를 폭격하는데 그때만 해도 조종기술이 시원치 않아 폭격 후 낚아채 올라가 보니 비행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서로 자기편대를 찾는다는게 다른 편대를 따라가기도 했어요.
비록 시험비행이었지만 우리공군이 독자로 대편대군으로 폭격 나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미군편대의 요기로 한 두대 끼어 출격 나갔지요. 52년 초부터는 지상전투가 교착되고 중부에서 고지쟁탈전이 치열했기 때문에 적의 대공포화도 이곳에 집중된 것 같습디다.
52년1월13일 김두만 소령을 편대장으로 전봉희 대위·윤응렬 대위·정주량 대위·손흥준 중위와 같이 이천북쪽 4㎞쯤 되는 개중리의 적 보급로를 폭격 갔을 때는 적대공포가 어찌나 치열한지 앞뒤비행기가 안 보일 정도였어요. 비행기 가까이서 포탄이 터져 기체의 요동도 심하구요. 이천출격 다음날인 1월15일에 전략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는 승호리 철교를 폭격하러 나갔어요.
이날 오전에는 옥만호 대위 편대의 3대와 윤응렬 대위의 3대 등 6대가 나가 철교 두어 곳을 끊은 뒤에 이어 하오 1시에는 이기협 대위, 손흥준 중위, 김금성 대위, 전봉희 대위와 내가 1개 편대로 나섰습니다. 오전·오후에 걸쳐 불과 11대의 폭격으로 미 공군이 근 5백회나 출격하면서도 못 부순 철교를 끊어놓았지요. 승호리 철교 폭격은 그때 「유엔」군이나 우리 공군 할 것 없이 큰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미 공군의 고급장교들은 한국공군의 철교폭파성공여부를 두고 내기까지 걸었다더군요. 6·25 전쟁 중 우리 공군이 얼마 안되는 비행기로 큰 전과를 올린 것은 순전히 정신무장이 잘 돼 있기 때문이죠. 조종사는 물론 정비사도 확고한 신념과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훈련도 고되지만 엄하게 철저히 시켜야 결국 그것이 조종사자신을 위한 길이지요. 요는 조종사는 늘 비행기와 함께 살며 비행기를 많이 타야 합니다.>
▲임순혁씨(당시 제10전대조종사·대위·현○○부대장=준장) <52년9월 말께에 평양지리를 잘 아는 조종사는 나오라고 합디다. 나는 평양출신이어서 나갔더니 모두 상황실에 집합해있더군요. 여기서 승호리 수중교를 폭격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알다시피 이해 1월15일에 승호리 철교는 우리 공군이 폭파해 개가를 올렸는데 적은 그동안 또 감쪽같이 수중에 「시멘트」다리를 놓아 이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미 해병대의 「코르세어」기들이 이 수중교를 부수려고 2백여회 출격했지만 희생만 내고 성공치 못해 또 철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공군이 맡게됐다는 겁니다.
평양출신의 윤응렬 소령과 출격의 명수 옥만호 소령을 각각 편대군장으로, 그리고 유치곤 대위와 나를 편대장으로 한 16대가 출격했습니다. 강릉에서 서울을 거쳐 곡산을 지나니 적의 고사포가 제법 정확히 올라옵디다.

<승호리 수중교 폭파에도 수훈>
목표지점에 도달하여 우리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공격했어요. 내가 급강하하면서 고도계를 보니까 2천5백「피트」였는데 조준기에 들어온 중심부에 기수를 안정시키고 「버튼」을 눌러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상승하며 보니, 대동강입구 모란봉 위에 그들의 소위 「해방탑」이 보여 거기다 대고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남으로 빠져 나왔어요. 다음날 목표물인 수중교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소식에 우리숙소는 축제기분이었지요. 며칠 후 미 해병항공대에서 승전「파티」를 열어주더군요.>
한편 전투조종사들은 첫 출격과 1백회 출격 때가 가장 감명적이며 인상적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물론 첫 출격 때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김중보씨(당시 공사1기생·현 공군본부참모=소장·42) <52년2월에 훈련비행을 끝내고 강릉의 제10전비전대에 갈 때 나는 이희근·윤여중·김영환·이주표·김영민·고광수·이배선·최영창·김낙규·이관모·천영성·정해영 등과 함께 행동했어요.
강호윤 전대장은 내가 가슴 두근거리며 첫 출격할 때 목표명중과 대공포화 등을 인식치 말고 편대장기만 따르라고 지시합디다. 목표 맞는 것을 확인한다고 정신 팔다가 편대장기를 놓치면 적의 집중포화를 받는다는 거죠. 처음 출격했다와서 목표에 명중하는 것을 보았다고 뽐내는 조종사는 전대장한테 호된 기합을 받았습니다.>
▲윤여중씨(당시 공사1기생·현 공군사관학교장=소장·44) <51년8월에 처음으로 단독 훈련비행을 할 때는 몹시 기쁘고 감명적이었는데 52년1월에 원산적지에 첫 출격할 때는 불안하더군요. 현창건 중위가 편대장이고 나는 4번기를 몰았는데 그저 1번기만 놓치지 않겠다고 따라다니다 보니 폭탄이 목포에 명중했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백만길씨(당시 공사1기생·현○○부대단장=준장·45) <내가 첫 출격 나간 것은 51년12월에 사리원의 보급소 폭격인데 이때는 그냥 따라만 갔고, 실제로 폭탄을 투하한 철원·금화의 적 폭격 때였습니다. 때의 심정은 정말 착잡했어요.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목숨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부모에 불효자식이 안되겠다는 등 온갖 상념이 오갑디다. 그러나 나의 임무는 이제부터라고, 강력한 투지도 솟아오르기도 하구요.>

<제대날짜 세듯 출격회수기록>
▲김영환씨(당시 공사1기생·현○○사령관=소장·방) <그때 강릉기지 조종사들은 아예 돈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고, 어떻게 하면 빨리 1백회 출격기록을 세우느냐는 생각뿐이었어요. 이 기록을 세운 선배조종사들이 영웅적인 환영을 받고 뽐내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나도 1백회를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또 출격하면 일단 후방으로 휴가를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죠. 나는 모자에다 출격횟수를 작대기 형태로 표시했어요.
마치 제대를 며칠 앞둔 사병이 달력을 하루하루 지워나가는 기분이지요. 그래서 하루에 2회 출격이 있는 날은 기분이 몹시 좋았습니다.>
▲전형일씨(당시 조종간부1기생·현○○부대단장=준장·41) <나는 53년3월15일에 동해안에서 근접지원작전에 출격해서 숙원의 1백회 출격기록을 세웠습니다. 돌아오니 부대병장이 모두 나와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고 여고생들이 꽃다발세례를 해요. 1주일 휴가에다 1백만환(당시 화폐)의 상금까지 조종사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주요일지(1951년10월8, 9, 10일)
※10월8일 ▲김일성 고지서 격선 ▲경남경찰, 도내서 9월 중에 공비 4백15명 사살 ▲「리지웨이」사령관, 판문점에서의 회담재개에 동의.
※10월9일 ▲한국공군 원산출격 ▲10일에 휴전회담 쌍방연락장교회담개최합의.
※10월10일 ▲아군전차대 양구북방에서 진출 ▲미국방성, 10일 현재 공산군인명피해1백37만3천명이라고 발표.
※알림=규칙상 대부분의 현역장성들은 직책과 사진을 게재하지 못하게 돼있으니 이점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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