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저물가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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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가스·전기료와 같은 공공요금이나 치솟는 전셋값을 생각하면 ‘저물가’는 솔직히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단어다. 그럼에도 통계를 보면 저물가 시대가 슬그머니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7%를 기록했다. 이대로 가면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1.2%에 머물 전망이다. 외환위기 이후 14년 만에 최저치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2%였다. 2년 연속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치(연간 2.5~3.5%)를 크게 밑돌게 된 것이다. 아직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라 하더라도 저물가가 지속되는 디스인플레이션에 접어들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랫동안 물가가 목표치를 웃도는 인플레이션은 우리 경제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물가가 지나치게 낮은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투자와 소비의 발목을 잡아 경기침체를 부를 수 있고, 실업 증가와 세수 부족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임금 상승도 억제돼 가처분소득이 게걸음을 치고,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은 얼어붙는다. 저물가가 이어지면 1000조원에 이르는 가계대출 부담도 증가하기 마련이다. 일본 역시 거품 붕괴 이후 7년간 저물가가 이어지다 본격적인 장기불황의 늪으로 떨어졌다.

 물론 경제정책 방향을 당장 저물가에 대비한 쪽으로 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플레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린다든지 재정을 쏟아붓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실업률과 함께 저물가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럽은행이 기준금리를 0.25%로 전격 인하한 것이나, 미국 연준(Fed)의 차기 의장 지명자인 재닛 옐런이 양적완화의 지속을 선언한 배경에도 저물가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도 저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말아야 한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전 세계의 물가가 가라앉고, 원화가치로 우리의 수입물가 역시 내려가는 추세다. 얼마 전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저물가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저성장과 함께 우리 경제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