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대학자 설총의 본향은 경산군 압량면 여천동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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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 설총이 태어났고 또 묻힌 고장이 경북경산군압량면여천동·유곡동이라고 경북대 서수생 교수는 주장했다. 15·16 양일간 이곳 일대를 답사한 서수생·박태준 지방문화재위원은 흔적만 남아있는 도수암터와 사당·고가들을 둘러보고 이것들이 모두 설총과 직접 관련된 사적이라고 지적했다. 1천3백여년 전 설총의 유적지가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서 교수는 지난 5년 동안 옛 문헌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록을 현지 답사를 통해 확인함으로써 이 같은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신라의 옛서울 경주에서 서남1백여리에 있는 이 마을에는 고래로 전해오는 설총의 사당 도동제가 현존한다. 마을 유림에 의하여 음력3월 상정날에 제사를 지내고 여기에 그의 위패가 모셔있음은 물론이다.
인접 신월동은 설총의 출생지일 뿐 아니라 고승 원효대사의 고향으로 전설 돼오는 곳이다. 원효대사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누이동생 요석공주와 동정한 뒤 이곳에 낙향하여 설총을 낳았다고 지방 고로들은 말하고 있다.
이곳 기름골로 속칭되는 유곡동에는 신라 때의 옛절터 도수암 자리가 있다. 바로 설총이 만년에 유생들을 가르쳤다는 절터로 초석과 기왓장이 가득 흩어져 있다. 또한 화강석 탑기단의 다듬은 돌과 등석으로 전하는 석재도 있다.
서 교수는 이 도수암에 세워졌던 5층 석탑 가운데 탑신2층이 현재 경산중학교 교정에 소장되어 있음을 찾아냈다.
이 탑신이 경산중학교에 옮겨지기는 50여 전년 일제 때 공의로 와있던 일본인 구미씨가 당시 자기집 정원이었던 이곳에 갖다놨다고 한다.
절터에서 동북 1·5km쯤 여천동 뒷산인 속칭 남솔뫼의 양지바른 산허리에는 한 폐총이 덩그러니 있다. 여천동의 옛이름의 유천동 즉 지금 속칭되는 「버드내골」이다. 봉분이 직경10m가 넘는 거대한 설총묘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비바람과 사태로 허물어져 봉분이 3분의 1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도굴자에 의해 5∼6군데 파헤쳐졌다.
이곳에는 조그만 묘비가 있었다는 것이 마을사람들의 증언이다. 그런데 2백년 전쯤 안동 장씨가 그 밑에 조상의 산소를 정하기 위해 인근 어벙굴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 경주지·홍유후설 선생실기 등 문헌과 매우 일치하는 것이라고 서 교수는 주장했다. 특히 경주지에는 설총이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했다고 기재하고 이어 『딴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장사지내 묻혔다』는 주를 달아놓은 점을 주목하고 있다.
설총은 문묘에 배향하였던 첫 인물로 자는 총지, 신라에 처음 한문이 들어왔을 때 구경을 우리말로 풀이하는 사독문자를 발명, 한문경전을 풀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밖에 설총은 신라신문왕의 모든 국정자문에 응하면서 중국 등 외국에 보내는 귀중한 문서를 스스로 작성, 문장보국의 공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설총의 문장으로 오늘날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 설총열전의 화왕계 1편이 남아있다.
고려 현종13년(1022년)에는 설총숭배사상이 싹터 왕이 문묘에 처음으로 배향하면서 홍유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대구=이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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