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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등반대 일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71년 5월4일=「히말라야」의 거 봉「마나슬루」(해발 8156m)등반도중 김기섭씨(당시 25세)가 강풍에 휘말려 추락 사망.
▲72년 1월12일=죽은 기섭씨의 둘째형 정섭씨(39)를 총 등반대장, 셋째 형 호섭씨(29)를 등반대장으로 하고 막내 동생 예섭씨(22), 매형 서충길씨(35)등 일가가 중심이 된 2차「마나슬루」등반대가 결성.
▲2윌5일=호 섭씨를 등반대장으로, 서충길씨를 부대장으로, 최석모씨(36), 연응모씨(3l), 오세근씨(28)등 1진 5명 출발. 일본에서「베이스·캠프」설치용 특수등산 식량 등 장비 구입.
▲2월10일=1진「네팔」의「카트만두」에 도착.
▲2월17일=총 등반대장 정섭씨 등 2진 5명 현지로 떠남.
▲2월28일=「카트만두」를 떠나「베이스·캠프」(해발 4300m)까지「캐러밴」시작.
▲3월2일=「차랑케베티」에 도착.
▲3월3일=「비라간다기」강을 따라 전진 계속,「히말라야」의 줄기인 수많은 암벽과「크레버스」를 건넘.
▲3윌7일=해발 2,800m「나가르코트」에서 산신제.
▲3월13일=해발 4600m 인「사마」마을에 도착.
▲3월14일=600m를 더 전진, 빙하근처에「베이스·캠프」를 설치.
▲3월18일=「오스트리아」등반대도「마나슬루」서쪽 능선을 등반하기 위해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한국등반대는 속공으로 먼저 등정할 것을 결정, 가벼운 눈사태를 만남.
▲3윌19일=해발 5900m「나이케콜」까지 등반했으나 눈사태를 만나 다시 후퇴, 전대원 제1「캠프」에서 합류.
▲3월21일=총대장 김정섭씨 지휘아래 제2「캠프」설치하기 위해「노스피크」밑으로 출발.
▲3월22일=해발 5900m「나이케쿨」에 제2「캠프」를 설치하는데 성공.
▲3월27일=해발 6500m「노드콜」밑 80도 급경사 빙벽아래 제3「캠프」설치.
▲4윌1일=폭설. 예정 바꾸어 제2「캠프」로 철수.
▲4월3일=「캠프」와「캠프」사이 교통이 두절될 정도로 폭설이 내림.
▲4월5일=일기 계속 불순, 아침에는 맑으나 하오에는 흐려지고 밤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쳐 고전. 등반대는 정상을 정복하는「팀」과 기 섭씨 시체를 찾는「팀」으로 나눌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모두 정상을 도전, 정복한 뒤 하산 길에 시체를 찾기로 결정.
▲4월6일=다시 제3「캠프」로, 이제 정상이 1천5백50여m쯤 남았다.
▲4월10일=한국등반대에 최대의 참사. 제3「캠프」에 자고있던 김호섭씨 등 대원 3명, 한국인 사진기자, 일본인 사진기자 등 6명과「셰어퍼」12명 등 모두 18명이 눈사태에 깔림. 이 눈사태는 첫번「텐트」를 8백m까지 밀어내고 다시 덮침. 이때 예 섭씨와「셰어퍼」2명이 극적으로 생명을 건짐.
제2「캠프」에 있던 정 섭씨 등이 구조차 현장에 갔으나 아무 것도 발견치 못함.
▲4월14일=「뉴델리」주재 한국총영사관, 등반대 참사를 알았다. 이날 새벽 4시쯤 외신도 참사「뉴스」1보 발신. 하오에야 참사 자 신원 등이 밝혀짐. 최운상 총영사 등 현지에 도착, 사후대책 강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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