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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건국호의 출격①|하늘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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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괴의 6·25남침 때 피아의 전체병력과 장비에 있어 아군이 훨씬 열세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공군력의 경우는 그 차이가 심했다. 북괴는 IL-10기, 「야크」9기 등 소제전투기2백11대를 갖고 있었는데 비해 한국공군은L-4기·L-5기 12대와 AT-6기(건국호)10대등 도합 22대에 조종사는 20여명밖에 없었다. 대수에 있어서도 10대1의 열세지만 더구나 성능은 아군의 22대가 전부 연습용 비무장기여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열세에다 공군으로서는 더욱 치명적인 기습을 받아, 사태는 더 절망적이었다. 이래서 미 공군의 본격적인 내원이 있기 전인 4, 5일 동안 제공권은 완전히 그들 수중에 들어가 서울·김포·여의도·수원 등지에는 적기의 내습이 잦았다. 그러나 한국공군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건국호와 L형 연습기를 몰고 무모할 이만큼 용감한 출격을 계속했다. 또한 이 무렵에 공군은 부득이 전투요원만 남기고 학교 등 행정부대들은 각자 행동을 취해 후방에 모이도록 비상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다음은 가장 암담했던 이때의 관계자들 이야기.

<25일 적기기습 받고 부대정돈>
▲장덕창씨(당시김포기지사령관=대령·예비역공군중장·현 사업·69)<6월25일 아침에 공군정보국장 윤회균 소령이 김포의 내 관사로 찾아와 오늘은 이때까지 산발적으로 벌여왔던 북괴의 도발과는 양상이 다른 전면남침을 기도한 것 같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곧 여의도로 달려가 김득룡 헌병 대장실에 있다가 적기의 기습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사무실에 그냥 앉아있었으나 안될 것 같아 김 소령과 같이 밖에 나가 엎드렸지요.
27일 상오에 참모총장 김정렬 대령이 국방부서 돈을 가지고 나와 부대별로 나누어주면서 조종사와 경비부대를 제외한 여타부대는 각 지휘관 재량에 따라 각자행동을 취하라고 합디다. 나는 김포기지부대의 1백 여명을 데리고 수원으로 내려가 1박하고 28일에는 대전으로 갔어요. 일부병력은 이탈해서 각자 행동도 했지만 대부분은 단체적으로 움직였어요. 계속 남하, 광주를 거쳐 제주도로 건너갔는데 부대원을 점검해보니 70여명이 됩디다. 모술포 비행장을 차지하고 부대를 정돈하고 있다가 진해로 이동했습니다.>
▲김정렬씨(당시 공군참모총장=대령·전 국방장관·현 삼성물산사장·55)<나는6월24일에 주한미대사관 공군무관 「윌리엄즈」소령이 본국에 출장 간다 기에 전송하러 김포공항에 나갔어요. 하오 2시에 출발예정인 미 공군기는 뜨다가 고장을 일으켜, 우리는 일본 「이다즈께」서 다른 비행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비롯한 공본 간부들은 밤12시까지 기다리며 전송하는 바람에 문제의 육군회관낙성식 「파티」에도 참석 못하고 25일 새벽 2시에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좀 늦게 일어나니까 숙직 장교로부터 사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이 왔어요.
즉시 회현동의 공본에 들렀다가 국방부에·들어갔더니 거기도 아직은 정확한 정보가 없어요. 여의도에 나가 10분쯤 있으니까 「야크」기가 날아와 기총 소사를 퍼붑디다. 김포도 공습을 받아 바로 어제 「윌리엄스」소령이 타고 가려다가 고장난 미 군기가 불탔다는 연락이 오구요. 적기는 25일 하루종일 10여 차례나 여의도에 내습, 기총 소사를 가했지만 건국호 1대만 파괴됐을 뿐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25일 저녁 때 국방부로 들어가 여의도비행대에 적정경찰을 명령하고 계속 27일 오전까지 거기서 기거하면서 공군작전을 독려했어요. 의정부·동두천·탄천 지역에 정찰 나갔던 우리 비행기들의 보고는 아주 비관적이었습니다.

<건국호에 폭탄 10개씩 달아>
나는 병기행정부장 김창규 대위에게 30파운드 짜리 시제폭탄 2백74개를 모두 가져오라고 했어요.
건국호를 한번도 타보지 않은 조종사들이 이 폭탄을 싣고 나가 그냥 손으로 투하했습니다. 26일 밤에는 건국호에 시제폭탄 10개씩을 달수 있도록 장치를 하고 기관총도 달았어요. 27일부터는 이강화 중위·김두만 중위·주영복 소위 등이 동두천·탄천·문산 쪽으로 출병했습니다. 26일 영시 국방부에서 3군 고위회의를 열었어요. 여기서 전세가 위급하니 27일을 기해 정부는 남하하고, 해본과 해군은 진해로 내려가 대기하고, 공군은 전투력을 동원, 전력을 유지하며 수원으로 후퇴, 육군은 계속항전하기로 결정했어요.
나는 회의를 마치고 공본으로 돌아와 27일 상오10시쯤 공군에 배정된 모든 예산을 한은에 가서 모두 현금으로 인출해 오도록 했어요. 참모회의를 열어 제반서류를 태우도록 하고 각부대장은 12시까지 여의도로 집결토록 명령했습니다. 이정희 대위를 불러 50명의 여자항공대는 해산토록 했구요. 여의도에 가서는 이날 밤 수원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공사, 공군본부, 김포기지사령부 및 기타부대는 각 지휘관 재량에 따라 행동하도록 했어요. 나는 비상조처로 조종사·경비사 및 그 밖의 5백 여명의 작전부대만 지휘키로 비상한 결심을 한 겁니다.>
▲김신씨(당시여의도비행대제1중대장=중령·예비역공군중장·전주중대사·현 교통부장관·50)<나는 6월25일 하오에는 여의도에서 적 「야크」기의 공습을 몇 차례 피하고난 다음 at6기 건국호를 몰고 동두천·의정부 쪽으로 경찰비행을 나갔습니다. 포천 상공서 내려다보니 우리 장갑차와 「탱크」가 맞부딪쳐 싸우는데 우리편의 화력이 상대가 안돼요. 정말 안타깝더군요.
폭탄이 있으면 적 「탱크」위에 한방 던지는 건데….상공을 돌면서 정찰을 계속하는데 괴뢰군의 대공포화가 심해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26일에도 「야크」기들이 여의도격납고에 기총 소사를 했는데 영등포시민들은 우리공군이 훈련하다가 오사한 줄 알았다는 거예요.>

<작업복입고 폭탄 안고 탑승>
▲장성환씨(당시여의도비행대 제2중대장=중령·예비역공군중장·전 교통부장관·현 사업·52)<비상이 걸렸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여의도로 막 달려가니까 김포를 공격한 적기가 이쪽으로 날아오면서 기총 소사를 가합디다. 좀 있으니까 영등포서서 경위가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지금 소사의 유탄으로 한 시민이 맞아죽었다면서 시민들의 항의가 심하니 사격훈련을 중지해달라는 거예요. 영등포시민들은 적기의 우리공군이 훈련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디다. 25일 저녁에 나는 동두천으로, 김영환 중령은 문산 쪽으로, 그리고 오춘목 소위는 춘천방면으로 각각 건국호를 몰고 적정정찰로 나갔습니다. 포천 상공에 이르니까 20여대의 적 「탱크」가 일렬 중대로 유유히 남하하고 있어요.
몇 바퀴 돌면서 내려다보니까 「탱크」포를 치켜세우며 올려 쏘더군요. 26일에는 동이 트자마자 시제폭탄을 한쪽날개에 5개씩 싣고 나가 적 「탱크」위에 투하했는데 전과는 의심스러웠어요. 돌아왔다가 다시 이양석 대령·김영환 중령·박희동 중위와 함께 동두천 쪽으로 출격하다가 기상이 나빠 나는 중지했지만 나머지 3명은 목표지점에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왔습니다.>
▲김성룡씨(당시조종사·대위=예비역공군대장·재향군인회부회장·47)<25일 아침8시쯤 적 「야크」기 2대가 날아오더니 격납고에 기총 소사를 했고, 11시쯤에 또 왔어요. 이날 밤에 정비사들이 밤을 새워 건국호에 폭탄적재장치를 해놓아 26일 아침부터는 시제폭탄을 싣고 나가 투하했습니다.
비행복도 안 입고 작업복을 입은 채 폭탄을 안고 나가 투하했는데 폭탄에 칠한 「페인트」가 옷에 묻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요. 적 「탱크」는 우리가 투하한 폭탄이 다행히 맞아도 꿈틀하다가는 그냥 움직이더군요. 약이 올라 무모하게도 권총까지 빼들고 내려 쏴 보았지만 사실 건국호나 L형 같은 우리공군연습기로써는 적 「탱크」저지에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류탄을 폭탄대신 투하도>
▲강호륜씨(당시조종사=대위·예비역공군준장·현 해사 행정 특별 심의장·50)<6월24일 밤에 내가 여의도비행대 주번사령이었고, 김두만 중위가 주번이었어요.
새벽에 주번사관이 뛰어들어오며 전쟁이 난 것 같다는 거예요. 곧 이북방송을 틀어 보니까 이편에 잔뜩 욕질을 하더니 총 반격명령을 내렸다고 떠들어댑디다. 날이 밝자 옹진에서 L-5기에 미군5명이 타고 온 것을 보고 적의 전면남침을 직감했어요.
나는 즉시 부대 안에 비상을 걸고 격납고 속의 비행기를 꺼내 분산배치하고 주유토록 조처했어요. 공군간부에게 연락을 하면서 출격준비를 했구요. 날이 밝으면서 우리 조종사들은 L-4, L-5기를 타고 전선으로 정찰을 나갔습니다. 나는 해주 쪽으로 갔는데 적 「탱크」가 떼지어 내려오는 것을 보니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26일 건국호에는 시제폭탄을, L형기에는 수류탄을 각각 싣고 출격하여 투하했어요. 적재장치가 덜돼서 일 측으로 적 「탱크」위에 손으로 내던지기도 했어요.>

<눈어림으로 「탱크」에 던져>
▲전봉희씨(당시 조종사=중위·예비역공군준장·전 공대총장·현 영남화학이사·48)<나는 l-4기조종사였는데 알다시피 l-4는 훈련기로 무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 「탱크」를 막아보려고 l-4기에30 「파운드」무게의 폭탄을 두 개를 싣고 나갔어요. 앞에서 조종하면 뒤에 탄 사람이 들고 있다가 목 측으로 「탱크」위에 냅다 던졌어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유치한 짓이지만 하도 다급하니까 그런 거지요.
재수가 좋으면 전과도 있었어요. 나도 이런 식으로 적 「탱크」두 대를 부쉈으니깐요.>
◆주요일지(1951년9월14, 15, 16일)
※9월14일 ▲국군, 간성 서북방서 적과 격전 ▲서부전선에 적 「탱크」8대 출현 ▲북평방질, 한국파견 의용군 새로 모집보도
※9월15일 ▲합천에 공비출현, 지서점령 ▲「리지웨이」사령관, 대일 강화조약 체결에 즈음하여 일본국민에 「메시지」 ▲「나토」이사회의 개최 ▲북평방송, 휴전회담에 대한 미국태도 비난
※9월16일 ▲양구북방서 백병전 ▲한국공군, 강릉비행장확장 ▲한국해병대, 김일성 고지탈환 ▲「이란」서 극우 「쿠데타」음모발각 ▲소련신문, 대일 강화조약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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