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고분문화의 원유|김기웅<전 우석대 교수·고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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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본의 나량현 「아스까」 촌에서 고구려고분벽화의 양식과 유사한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일본인학자 대부분은 한국고분문화가 일본고분문학의 원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면서도 대륙 묘 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얼버무려 왔으나 이제 이 엄연한 객관적 사건 앞에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더욱 고분의 내부구조만 대북 해 보아도 확연해지는 것이다.
원래 고분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 입지조건과 분형 및 규모, 내부구조, 피 장자와 부장품, 이밖에도 이와 관련된 시설이나 제요소의 유기적 결함관계에 이르기까지 명확히 해야 하지만 우선 고분의 중추적 요소인 내부구조와 벽화고분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일본장식고분에 관하여서만 언급하고자한다.
◇내부구조=일본 고분고찰에 있어 고분의 입지조건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4세기초 기내지방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일본발생기고분은 고구려·고 신라의 평지선정과는 달리 백제·가야고분과 똑같이 구릉의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있다.
벽화고분이 발견된 「아스까」촌 일대의 조사 고분1백여 개 가운데 10여 개만 제외하곤 낙동강유역 가야고분이나 공주·부여부근의 백제고분의 입지조건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벽화고분과 이웃해 있는 흠명·천무·지통 및 문무 등 천황릉도 구릉의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있다.
고분의 외부시설인 분구 형태를 살펴보면 고구려·백제초기의 방형과 신라의 쌍 원형을 제외하고는 한국고분은 원형이다.
이에 비해 일본고분은 방·원·쌍원·전방후원·전방후방·쌍방 중원형 등 다양하게 변화하면서도 방·원·전방후원형이 주가 되는데6세기 후반 무렵에 전방후원형이 자취를 감추고 방·회형이 고분시대 종말기인7세기말까지 존속한다.
벽화고분은 이시기를 벗어날 수 없는 원형분이다. 또 석곽 안의 건칠관과 동일한 관이 나온바 있는 5기의 고분이 모두 원형이었으며 이들의 책조 추정연대가 6세기후반부터 7세기후반에 걸치고 있음도 주목된다.
그런데 이번 벽화고분이 고구려 계냐 백제 계냐를 추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벽화라고 하겠는데 다소 참고될 자료가 있다. 즉 벽화고분의 이웃에 있는 6세기후반의 흠명천황릉이 중국북조의 동괴(538∼550년)가 제정하여 고구려에서 받아들여 사용한 고구려 척에 의하여 설계되었다는 사실이다. 시기·위치·입지조건 등이 비슷한 벽화고분이 고구려 척에 의하여 축조되었다면 6세기말에 백제 계인의 건립으로 보는 사천왕사를 같은 고구려 척으로 지었다는 점에 미루어 다분히 백제 계라는 인상을 받게된다.
일목고분의 내부구조를 보면 수혈식 석곽, 수혈계횡구식 석실, 횡장형 석실, 합장형 석실 등이 있는데 수혈식 석곽은 고분문화초기인 4세기초부터 5세기 전반까지 존속한다. 곧 수혈식 석곽이 북구 주에 나타나기 전까지이다. 이 수혈식 석실은 일본보다 앞선 시기에 가야에서 성행된 양식이다. 그것은 청동기시대 묘제인 지석묘하부구조의 전통을 이어 받아 오랫동안 사용한 내부구조이다. 수혈계횡구식 석곽은 5세기후반 북구주에 출현하기 전까지는 가야고분의 일부지방에 있어 주체를 이루었다.
한편 일본고분문화에 일대 전환기를 마련, 장제에 큰 변혁을 일으킨 것은 횡혈식심실이다.
5세기전반경 북구주에 등장하기 앞서 고구려에서는1세기전후, 백제에서는 3세기 후반 경에 보편화되어 있었다. 북구주에 처음 나타난 횡혈식 석실구조는 백제초기 것과 유사하며 삽시간에 기내지방까지 미쳐 재래의 장제를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았으며 고분 종말기까지 존속한다.
합장형 석실은 6세기 중엽 일본중부지방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러나 그에 앞선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전반에 이르는 공주시기 백제고분의 일부에서 엿보이는 양식이다. 이밖에 고분이 군집양상을 이루는 횡혈묘도 일본에서 6세기후반부터 성행했지만 역시 백제의 부여시기 분제의 하나다. 이상에서 비교한바와 같이 일본고분의 내부구조는 그 모두가 그에 선행한 한국 특히 백제와 가야고분의 그것과 일치하며 일본고분문화 전 시기를 통하여 인접 한반도의 영향이 짙게 지배하고 있다.
벽화고분의 축조시기와 피 장자의 계통이나 신분을 신문기사만으로 상고할 수 없으나 한가지 축조시기추정에 긴요한 자료로 건칠관이 지적된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모두 다섯인데 그중 셋은 「아스까」촌에서, 둘은 인접 대판 부에서 나왔고, 한결같이6세기후반부터 7세기후반에 걸치는 원형 분구의 장방형석실이었다. 즉 일본에 있어서 건칠관 사용은 한 시기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벽화내용과 화법 등으로서는 고구려 계로 추정할 가능성이 짙고 또 고분양식의 원류를 고구려까지 소급할 수 있겠으나 직접적인 관련은 역시 백제 계로 보아 무리하지 않다.
특히 고분의 입지조건이나 석실구조 및 당시 백제와 일본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백제 계라 추정케 된다.
이 벽화고분이 발견되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고구려·백제와 같은 벽화고분의 발견 예는 없었다. 약간의 조각·채색으로 내부를 시설한 석실 및 석관의 장식고분이 있었을 뿐이다. 이 장식고분도 독자적으로 발생·발전한 것이 아니라 횡혈식석실의 도입과 곁들여 한국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았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장식고분가운데 벽화의 초기적인 것은 6세기전반 북구주복강현일강 고분에서 비롯되는데 이 고분의 구조는 백제중기 공주부근 고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장식고분은 거의 모두가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어 있을 따름이고 6세기후반의 진부총과 7세기초의 죽원고분 2기에서만이 사신도·풍속도를 그리는 한국 고분의 벽화양식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한국벽화고분양식의 완전한 벽화고분이 일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일본고분문화사상 더 없이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묘제란 사람들의 신앙에 기초를 둔 사회적 습관의 하나로서 그 보수성이 매우 강하고 쉽사리 변혁되지 않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계급과 계층의 차이를 극단으로 반영하고 특정의 매장관념아래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피 장자의 권위의 변화와 그에 대응한 현상이라고 볼 때 일본고분의 변천은 가야·백제의 매장관념을 지닌 한국인의 집단이 선 주민을 정복, 이주한데서 일어난 결과라고 보아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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