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되기보다 어려웠던 고향의 「명예시민」브란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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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브란트」서독수상이 최근고향인 항구도시 「뒤베크」에 돌아가 명예시민이 됐다.
수상직에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 고향에서 명예시민증을 주는 것이 당연한 듯 생각되지만 「브란트」의 경우 파란이 많았다.
「뒤베크」시의회의 사민당 측에서는 이미 70년 「브란트」를 명예시민으로 추천한바 있었으나 야당인 기민당이 극력 반대, 흐지부지 됐었다.
반대의 이유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었으나 실은「브란트」수상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개입돼 있었던 듯하다. 즉 부친을 모르는 사생아에 조국을 등진 도망자라고 보수적인 인사들에게 「브란트」에 대한 인상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란트」수상이 「뒤베크」시에서 출생했던 것은 1913년, 상점 점원인 어머니를 버리고 부친은 잠적해버렸다.
「브란트」가 사회주의에 기울게 됐던 것은 역시 사회당이었던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사회주의운동에 몰두했다.
「나치스」의 집권과 함께 지하로 숨어 들어간 사회당활동은「브란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33년4월 「브란트」는 해외에 지하저항운동 거점구축의 사명을 띠고 「덴마크」로 밀항했다. 그의 반대파 인사들은 「아데나워」처럼 국내에 숨어 「나치스」에 저항할 것이지 어째서 외국으로 도망가는 배반자가 됐느냐고 비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전과 함께「브란트」는 독일인이 아니라 연합국인 「노르웨이」군의 정보장교로 조국에 돌아왔다. 이미 독일국적을 박탈당해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듯하다. 이때 「뒤베크」에서 그를 시장으로 맞아들이겠다고 제안했으나「브란트」가 이를 사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본명은「헤르베르트·프람」.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나치스」에 저항, 지하활동을 하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노르웨이」망명생활 중 아주 개명해 버렸다. 그의 개명은 단순히 이름뿐이 아니라 인간자체의 변신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명예시민추대를 반대하던 인사들도 지난해 「브란트」가 「노벨」평화상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반대의견을 철회, 「브란트」가 이번에 금의환향하게 된 듯하다. <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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