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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스펙에서 해방시켜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9호 31면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영어 사교육 시장은 1년에 19조원 규모에 이른다. 그럼에도 어느 국제 학업 성취도 기준에 따르면 한국인의 영어 실력은 중간 수준이라고 한다. 한국은 60개국 중 24위를 기록했지만 경제 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인도네시아가 25위로 바로 뒤였고, 베트남도 28위였다.

한국 영어교육이 큰 문제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원인에 대한 논의는 빈약하다. 해법이 보일 리가 없다. 원인은 뭘까.

일반적으로 볼 때 교육 정책이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가르치는 이의 능력 혹은 교수법이나 학습자의 노력 부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보통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모두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효과가 없는 셈이다.

한국 영어교육에서 부족한 것을 찾기 위해선 ‘영어교육이란 뭔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어는 한국인에게 언어학적 거리가 아주 먼 외국어다. 독일어·프랑스어와 달리 한국어와 영어 사이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어족과 문화권도 다른 데다 역사적 교류도 없어 공통 문법·어휘도 전혀 없고 사회언어학적 차이도 크다. 그래서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데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상식이긴 하지만 어려운 것을 배우기 위해선 많은 연습이 필수이며, 결국엔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게 많은 현실에서 특별히 품과 시간을 많이 들여 영어를 학습한다는 건 좀체 쉽지 않다.

그런데 한국 학교에선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이 있기 때문에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학교에서 못 하면 학교 바깥에서 기회를 찾게 되고, 그게 바로 학원 시장의 원동력이다. 한국 사회가 영어 실력을 요구하나 학교에서 그에 필요한 만큼 학습 기회를 주지 못하면 학교 밖에서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어서다.

물론 학습 시간 외에 교재·교수법·교사 능력도 영향을 미친다. 옛날엔 영어 교과서에 어색한 표현도 있고, 한 반 학생이 60명이었며, 교사가 영어를 배울 기회가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시작된 영어교육 개혁을 통해 이런 문제들은 많이 개선됐고 원어민 보조교사 채용과 같은 획기적 개혁도 이뤄졌다.

그러나 여기서 빠져 있는 중요한 게 있다. 영어의 필요성과 영어를 배우려는 동기다. 현재 영어교육 패러다임에서 영어 실력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져야 할 스펙에 불과하다. 그 스펙이 없으면 뒤떨어질 거라는 공포 때문에 돈을 들여 사교육으로 이를 해결한다. 영어 자체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영어 스펙을 취득하기 위한 비용인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스펙 수준의 영어로는 실제로 외국인과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제 학업 성취도 기준에서 영어 실력이 투자한 만큼 높게 나오지 않은 것이다.

결국 스펙이 문제라면 스펙이라는 것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영어가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외국어임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 나라의 언어인 중국어·일본어도 중요하다. 외국어 말고도 필요한 능력은 많다.

이렇게 보면 영어교육 문제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영어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영어 공부 투자가 스펙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영어교육의 태생적 어려움을 고려한 내실 있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물론 영어를 포기한 사람이 많아져 한국인의 평균 영어 실력이 떨어질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단순한 평균이 아니다. 튼튼한 영어 활용 인구의 형성이다. 영어를 스펙에서 해방시키지 않는 한 영어교육에 대한 실망과 그에 대한 지루한 논의는 계속될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 미국 미시간대에서 동양어문학 학사, 언어학 석사를, 아일랜드 트리니티대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다. 일본 교토대를 거쳐 서울대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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