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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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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보름 끈 의제합의>(1)
「유엔」군 측 대표의 일원인 「아레이·버그」 제독이 근착 「리더즈·다이제스트」지에서 회고한바와 같이 미국은 늦어도 한 달이면 휴전회담은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17일을 끌었고, 5개 항목의 의제에 합의를 보는데 만도 15일이 걸렸다.
다시 말해서 회의에서 무슨 문제를 토의하느냐는 것을 가지고도 반달동안 입씨름을 벌인 것이다. 미국이 처음에 휴전회담을 이렇게 낙관한 것은 「말리크」가 먼저 회담을 제의해 왔고, 실제 전세는 「유엔」군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전쟁터에서의 열세를 회담장소에서 만회해보려는 공산 측 속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 대표들도 공산 측과 첫 대면을 하고서부터는 비로소 회담전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런 경위는 「유엔」군 측 수석대표인 고「C·터녀·조이」 해군중장이 한국 휴전 후 저술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수법』(How Communist Negotiate)에 잘 묘사돼 있다.

<곳곳에 무장공산군 우글>
문산의 「베이스·캠프」에서의 첫날밤 「리지웨이」 대장은 『우리 대표단이 7월10일의 첫 회의에서 수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산 측 대표단이 성의를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꿰뚫어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회의 첫날에는 적어도 의제정도는 확정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극히 낙관하고 있었다. 7월10일 아침 「리지웨이」 대장과 「캠프」의 전원, 그리고 여러 기자들이 우리대표단을 전송하려고 「헬리콥터」 발착장에 모였다. 『많은 성과를 거두고 오시오.』 이렇게 그들이 한결같이 격려해주는 말을 듣고 그날 저녁까지 휴전을 성립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듯이 느껴져 나는 온몸이 긴장과 흥분으로 오싹 떨렸다. 나는 개성을 향해서 나는 동안 맑게 개인 하늘아래 전개되는 아름다운 푸른 전원과 산야를 내려다보며 명상에 잠겼다.
헬기는 들에서 여름햇빛을 쬐며 일하는 농부들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날았다. 어린이를 등에 업은 아낙네들도 눈에 띄었다. 전화 속에서도 끈기 있게 이어나가는 생명…농부들은 우리를 응원해주는 듯, 일손을 멈추고 일어나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헬기가 목적지에 가까워져 하강하기 시작하자 이때까지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생각은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헬기를 둘러싼 공산 측의 영접원들은 모두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1분대쯤 되는 그들 사진반도 나와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지프」에 그들이 준비해 가지고 온 백기를 달고 회담 장소로 향하였다. 소제차와 그들이 노획한 미군 「지프」들이 늘어서 있는 주차장에 닿자 공산안내원들이 우리를 언덕 옆에 있는 회색 빚 석조 건물로 안내했다(주=인삼장). 길가에는 숨어서 우리를 엿보고 있는 공산무장병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인삼장 2층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거기에도 여기저기 서있는 무장공산군이 눈에 띄었다. 초조했던 내 마음은 분노로 변해갔다.
우리는 다시 「지프」를 타고 회의장(주=내봉장)으로 갔다. 공산 측 대표는 회의장과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별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해군중장 「조이」라고 했다. 말쑥한 얼굴에 녹색 제복이 몸에 잘 맞는 젊은 남자를 가리키며 그쪽 통역이 『이분이 남일 장군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 소개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머리를 끄덕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대표들의 소개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우리대표 한사람 한사람을 가리키며 이름을 일러주었다.
그후 양측대표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남일과 나는 서로 신임장 교환을 마칠 때까지 기립한 채 서 있었다.

<첫 회의 첫 발언엔 성공>
「리지웨이」 사령관은 첫 회의에서 우리편이 먼저 발언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장기를 둘 때 선수를 쓰는 전법을 이용하여 남일이 착석하기까지 그의 신임장 받기를 꺼렸다. 그가 앉자마자 나는 발언을 시작하여 계략은 들어맞은 셈이 되었다. 첫날 회의 때 의제로서 우리측은 9개 항목을, 그리고 공산 측은 5개 항목을 내놓았다. 나는 공산 측이 한국전쟁종결의 기본조건으로 38선을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로 하고 모든 외국군은 한국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의제합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10일 저녁 문산에 돌아와 나는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공산 측이 성의가 있는가 없는가에 관해 딱 잘라 보고할 수가 없었다.』 「조이」 수석대표를 비롯한 5명의 「유엔」군 대표들은 모두 국제회의에 참석한 경험이 없는 역전의 직업군인들이었다. 더욱이 백선엽 한국대표는 예외지만 공산주의자들의 교활한 협상 수법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유엔」군 대표들도 한두 번 공산 측과 대면하면서는 곧 그들의 간계를 깨닫고 만만한 투지와 비장한 각오로 회담에 임하였다. 여러 회담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5명의 대표들은 공산 측의 의도를 간파하고부터는 회의장에서도 전쟁터 못지 않게 최선을 다해 훌륭히 싸웠다. 「워싱턴」 지시로 어떤 문제에 양보해야할 때는 사임위협으로 울분을 표시한 미국대표도 있었다.
그러므로 회담「테이블」에서 때때로 「유엔」군 측이 양보를 한 것은 대표들 자체가 나약하거나 역량부족에서가 아니고 직접 미국무성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특히 「조이」 제독이하 모든 대표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회담에 임했다는 사실이 한 관계자 증언에서 밝혀지고 있다.
▲「리처드·F·언더우드」씨(한국명 원득한·당시 유엔군 측 대표 통역장교=미군중위·현 서울외국인학교 총감·44) <개성 때도 그랬지만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옮기고부터는 대표들 신변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판문점회담이 열릴 때는 아군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탱크」 1개 소대 가량을 남쪽 산밑에 대기시켜 놓았어요. 우리 대표들이 그 지점을 통과하면 「탱크」는 곧 시동을 걸어둔 채 경계태세를 취했지요. 그리고 대표나 다른 회담관계자들도 신호물을 모두 하나씩 가지고 갔습니다. 무슨 변이 생기면 연락하기 위해서 지요.< p>

<비상용 신호탄 몸에 지니고>
내가 가지고 간 것은 철로에 비상으로 쓰는 연막탄 비슷한 것이었지요. 신관을 쏙 뽑으면 금시 연기가 나고 빨간 불이 켜지는 것이었는데 이 같은 신호를 보면 「탱크」가 출동하도록 약속이 돼 있었어요. 「조이」 제독은 회담하다가 죽으면 죽었지 포로는 안되겠다고 말해 왔어요. 그는 만약 자기에게 무슨 변이 생기면 「탱크」는 북으로 가는 모든 차량을 공격 분쇄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해서 첫 회의가 끝난 뒤부터 「유엔」군 대표의 태도는 경화되었다. 11일의 제2차 회의가 「유엔」군 측 기자 출입문제로 대립되어 3일 동안 휴회된 후 제3차 회의는 15일에 열렸다.
이날에는 20명의 「유엔」군 측 기자들도 처음으로 개성에 들어가 회담을 취재했다. 「조이」 제독은 제3차 회의에서 회담장소에 서성거리고 있는 무장공산군을 철수시키고 개성을 중립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군 측 대표차량은 개성회담 장소로 이르는 도로를 무제한으로 사용토록 개방해야 한다. 차량 통행을 사전에 공산 측에 통고치 않는다. ②회담장소를 포함한 반경 5리의 중립지대 안에는 최소로 필요한 헌병이외에는 무장병이 출입할 수 없다. 상기 헌병은 소화기만으로 무강해야한다. ③회의장 자체경비에 필요한 요원들은 무강하지 않는다. 회의장을 중심으로 반경반리를 회의장 지역으로 규정한다. 「조이」제독은 또한 양측대표단 일원은 각각 1백50명으로 한정하고 회의장 출입인원은 상호합의에 따르자고 제안했다.
남일은 선선히 「조이」 제안에 동의했다. 그들은 이미 「유엔」군 측 기자 출입제지와 공산무장병 문제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조이」 제의에 응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공산 측은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무장군인을 회담장소에 출현시킴으로써 「유엔」군 측을 자극시켰는데 이 문제는 나중에 다루겠다.
15일의 3차 회의에서도 쌍방은 의제문제에 대해서는 일보도 의견이 접근치 못했다.
남일은 「유엔」군 측이 공산 측이 내논 5개 항목이 의제로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면 우리도 「유엔」군 측의 9개 항목을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남일, 호칭문제로 트집>
그는 38선에서의 정전과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꼭 의제에 삽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조이」 제독은 이 회의에서는 한국의 군사문제만 다루어야하며 외국군 철수 같은 정치문제는 토의할 권한이 없다고 응수했다. 공산 측은 이날 회의에서 호칭문제를 가지고도 말썽을 부렸다. 즉 「조이」 제독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는데 남일은 귀하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조선인민군』과 『중국의용군』이라고 주장했다. 「조이」 제독은 남일의 항의를 받고도 얼마동안은 그대로 『공산주의자』 혹은 『당신네들』이라고 계속 불렀다.
◆주요일지(1951년7월31일·8월1, 2일)
※7월31일▲이 대통령, 공비소탕에 공 세운 제8사단 표창▲「밴플리」 장군, 8군에 경계태세유지를 엄달▲15차 휴전회담 무 진전▲양유찬 대사, 휴전반대 성명
※8월1일▲16차 휴전회담 무 진전▲이 국방, 백 대표의 회담 「보이코트」설을 부인▲팽덕회, 「유엔」군 측의 고집 계속되면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겠다고 위협▲「애치슨」 국무, 미국은 공산 측의 38선 정전요구 수락 않는다고 언명▲서방측의 「베를린」 공수재개
※8월2일▲아군, 금성남방서 약간 진격▲17차 휴전회담 계속교착▲부산서 납치인사 가족 대회개최▲비행기 헌납운동 전개▲영 정부, 「이란」 석유국유화 정책 동의표명
※알림=휴전회담에 관련된 사진을 갖고있는 분은 중앙일보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 (28)821l(교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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