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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속으로] 기묘한 조합 … 루스벨트 철학·언어에 익숙 … "메모 없이 구술" 초안부터 한국독립 넣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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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루스벨트(왼쪽)와 그의 린치핀(최측근) 홉킨스.

카이로 선언문의 기안자는 해리 홉킨스(Harry L. Hopkins, 1890~1946)다. 직책은 대통령 보좌관이다. 여러 별명이 그에게 따른다. 대통령 복심(腹心), 권력 이면의 미스터리, 백악관 2인자-. 선언문 초안은 3국 공동으로 작성한 게 아니다. 홉킨스 단독 작품이다. 초안에 핵심이 거의 들어 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식민지 반환, 중국 영토회복, 한국 독립 결의다. 홉킨스는 회담 사흘째인 11월 24일 루스벨트 빌라에서 초안을 구술했다(FRUS 기밀문서). “그는 사전 준비된 노트나 쪽지 없이 구술했다.”-.

초안 작성한 대통령의 복심 홉킨스

 홉킨스는 루스벨트의 전쟁철학, 전략, 언어에 익숙했다. 루스벨트는 국무부 관료를 불신했다. 그는 외교현장에 홉킨스를 등장시켰다. 대통령 특사로 내보냈다.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대담 배석자도 홉킨스였다. 언론인 출신 정일화 박사는 “선언문에 수많은 식민지 중 한국의 독립만 들어간 것은 신비스럽다. 홉킨스의 공로”라고 평가했다.

 초안 작성은 루스벨트의 지시다. 루스벨트는 초안을 일부 수정했다. 장제스는 수정안에 만족했다. 처칠은 불만이었다. ‘인 듀 코스(in due course)’는 처칠의 모호한 외교 수사(修辭)다. 홉킨스 초안은 ‘가능한 한 빠른 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였다. 루스벨트가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다. 그것을 처칠이 바꾼 것이다. 처칠은 한국을 거의 몰랐다. 그 대목은 해방정국 갈등의 원천이다.

 용어 변화는 별 의미 없다. 루스벨트는 이미 한국 독립과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었다. 회담 8개월 전 루스벨트는 영국 외무장관 이든에게 그 구상을 비췄다.

루스벨트와 홉킨스는 ‘기묘한’ 조합이다. 출신과 경력, 성향이 대조적이다. 부유한 집안의 하버드 대학 출신, 뉴욕 주지사를 지낸 루스벨트. 홉킨스는 중부 벽촌(아이오와주의 수)에서 태어나 그린넬 대학을 나왔다. 그는 뉴욕에서 빈민구제의 시민운동가로 활약했다. 그가 뉴딜 정책의 디자이너로 나서는 발판이다. 루스벨트는 그를 연방긴급구호청장, 상무장관으로 중용했다. 홉킨스는 스탈린의 대독일 전쟁 지원에 앞장섰다. 그로 인해 좌파 친소주의자라는 의심도 받았다.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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