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보균의 현장속으로] 한국 독립문제 첫 논의한 역사의 무대 … 빅토리아풍 3층 건물 수려한 자태 남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메나 빌라의 현재 모습. 이곳에서 루스벨트·장제스가 한국 독립 문제를 논의했다.

1943년 11월 25일 낮 12시 루스벨트의 숙소인 메나 빌라(Mena Villa). 루스벨트·처칠·장제스가 빌라 정원에 모였다. 3개국 수행원 50여 명도 함께했다. 포토 섹션을 위해서다. 첫 기념사진은 빅 스리(Big Three). 이어서 쑹메이링이 처칠 옆에 앉았다. 쑹메이링은 유창한 영어, 미모와 패션, 사교술로 외교가 스타였다.

최초 발굴 루스벨트 숙소 '메나 빌라'

 3개국 군 지휘관들이 다음 차례. 미국 마셜 원수, 영국 마운트배튼 제독, 중국 상전(商震) 장군이 뒤에 섰다. 카이로에 뜬 별(3국의 40여 장군·제독)은 100여 개였다. 이어서 보좌관 홉킨스, 영국 외무장관 이든(Eden), 중국 비서실장 왕충후이(王寵惠)가 렌즈에 담겼다. 군사·외교실무회담 장소는 메나하우스 호텔. 삼국 정상의 주요 회담은 빌라에서 열렸다. 호텔에서 8㎞쯤 떨어졌다. 보안 강화, 루스벨트의 휠체어를 배려한 것이었다. FRUS에 따르면 빌라는 미국대사 커크(Alexander Kirk) 저택이다(임대로 추정). 그리고 “빌라는 중간 크기, 아름다운 가구를 갖췄고, 테라스와 뒤편에 멋진 정원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날 저녁 빌라에서 추수감사절 칠면조 파티를 했다.

 회담 후 빌라는 반세기 이상 잊혔다. 외국의 관련 사이트, 연구서, 기사 어디에도 빌라의 운명은 없다. 철저한 회담 기밀 유지와 대통령 경호 탓에 숙소는 감춰졌다. 그 후 세계사의 격동이 겹쳐 빌라의 사연은 사라졌다. 나는 그곳을 찾아야 했다. 역사적 사진의 현장, 한국 독립 문제가 국제무대에 첫 등장한 곳이다.

메나 빌라는 남아 있었다. 기적과 행운이다. 3층 석조 건물은 낡았다. 빛이 바랬다. 1층은 전면 수리 중이다. 하지만 빅토리아풍 외관의 수려한 잔재가 드러난다. FRUS 일지와 같다. 나는 건물 안 2층에 들어갔다.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만찬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집트 고풍의 장식들은 그대로라고 한다. 장제스는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그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기념사진 장소였던 정원은 잘 관리되고 있다. 빌라 소유자는 70년 전 갑부인 주인(Mahmoud Talaat)의 손자다. 그는 “집의 유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자료에도 없다. 어떻게 알았느냐”며 의아해 한다. 가족사의 자부심만큼은 드러냈다. “여러 기록엔 루스벨트가 메나 하우스에 묵고 회담한 것으로 돼 있다. 그것은 경호와 보안 유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밀한 다른 거처가 필요했다. 귀국 때 루스벨트는 우리 조부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했다.”

박보균 대기자

관련기사
▶ 카이로 회담 70년, '한국 자유·독립조항' 루스벨트가 주연
▶ '한국 독립' 첫 국제결의 … 그 역사의 진실은
▶ 초안 작성한 대통령의 복심 홉킨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