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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가와의 결혼-두달 앞둔 「스페인」왕실 최대의 혼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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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는3월19일 「마도리드」의 「파르도」궁에서 금세기최대의 「스페인 왕실결혼식이 화려하게 거행된다. 주인공은 알폰손 와 「마리아·댈·카르멘」알폰손 공은 전「스페윈」왕 알폰손 8세의 손자이며 「카르멘」은 30년 이상 「스페인을 다스려 오는 강자「프랑코」총통리 외손녀. 이 두 사람은 지난 12월23일「크리스털」「샹들리에」가 휘황찬란히 비치고 「고야」의 「파피스리」가 장식된 「파르도」궁의 「살롱」에서 역사적인 약혼식을 올려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날 「프랑코」 총통을 비롯해서 그의 후계자 겸 미래의 왕으로 지명된 「환·카를로스」일가 및 정부요인들이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그러나 약혼자 「알폰소」의 아버지 「세고비아」공작과 그의 삼촌「바르셀로나」백작이 참가하지 않아 「프랑코」와 「스페인」왕가사이에
아직도 완전한 화해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약혼자 「알폰소」의 아버지 「돈·하이메」씨(세고비아 공작)는 1931년 유배된 이래 「로잔」에서 처음으로 「마드리드」의 땅을 밟으려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돈·하이메」공은 『나는 아들과 「카르멘」의 약혼식에 축전을 보냈다. 이번엔 시기가 적합치 않았으나 다음 결혼식 때는 참석할 예정이다. 아들의 결혼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약혼자의 삼촌이며 「카를로슨 왕자의 아버지인「든·판」씨(바르셀로나 백작)는 「프랑코」와 역시 사이가 좋지 않아 「포르투같」 에 살고있는데 조카의 약혼식에 초대되지 않아 참석치 못했다.
「프랑코」일가와 구 왕가사이의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프랑코」손녀와 「알폰소」의 결혼으로 많이 달라지고 「스페인」정치사상 하나의 전환점을 이룰 것이 분명하나 「알폰소」의 「프랑코」 접근은 「카롤로스」태자와 「알폰소」두 사촌형제간의 미묘한 권력투쟁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1969년 「프랑코」총통후계자를 지명하기 전까지는 누가 다음 「스페인」의 정권을 물려받을 것인가로 논란이 많았다.
언론이 엄격히 통제된 「스페인」에선 정체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보다는 누가 「프랑코」의 후계자가 되느냐에 더 관심이 쏠렸다. 「알폰소」냐, 「카롤로스」냐로. 그런데 69년 「프랑코」 총통이 「카를로스」를 후계자 겸 왕으로 지명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왜냐하면·왕위 계승권으로 따지면 「카를로스」보다는 「알폰소」가 우선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알폰소」는 전왕 「알퐁스」8세의 장남 「세고비아」공작의 장남이며, 「카를로스」는 「알몽스」8세의 차남 「바르셀로나」백작의 아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고비아」공작이 불구라는 이유로 왕위계승을 못한데 있다. 「세고비아」공작이 왕위계승을 못했다면 당연히 그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많다. 그런데 「프랑코」는 「알폰소」대신 그의 사촌동생 「카를로스」를 왕으로 지명했다. 「스페인」정부는 「카롤로스」의 왕 지명은 「스페인」의 구 왕정이 복귀되는 것이 아니라 왕정의 신설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정당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던 「세고비아」공이나 그의 아들 「알폰소」는 「프랑코」의 선택에 노골적인 반발이나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고 있으나 왕권을 노리던 「알폰소」로서는 큰 실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알폰스」는 사실상 공적생활에 「카롤로스」보다 야심이 많았다. 그는 대학에서 법률을 우수하게 마치고 「이탈리아」 「스위스」등지에서 외교관수업도 쌓았다. 「환·카롤로스」가 국사에 직접 참가하는 반면 「알폰스」는 「스페인」외환은행에 적을 갖고 전 「유럽」동구 제국, 동남아 및 미주를 여행하며 외국지식을 쌓았다. 몇년 전엔 「이탈리아」상공회의소 부소장의 직을 갖는 등 두 왕위후보자는 팽팽히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왕으로 지명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카를로스 는 미래의 「스페인」을 다스리기 위해 「프랑코」아래서 모든 국사에 참여하고 있는 반면 「알폰소」는 「스웨덴」 대사로 임명되었다.
「알폰스」는 상당히 「리버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1년전 「마드리드」대학에서 청년문제에 관한 연설을 갖고 『「스페인」국민의 결정만이 중요하다』고하여 청년들을 고무하는가하면 『「프랑코」는 「스페인」운명을 구한 모범적 인물』이라고 말하여 「프랑코」를 역사적 인물로 밖에 평가하지 않은 인상도 주었다.
어떻든 「카를로스」는 왕으로 지명되고 「알폰스」는 「프랑코」가에 발을 들여놓게 됨으로써 두 왕자사이엔 다시 서로를 견지해야만 하는 「밸런스」가 생기게되었다. 「프랑코」총통은 한때 자기의 무남독녀 「카르멘」양을 「환·카를로스」과 결혼시킬 생각을 가졌는데 「카를로스」의 아버지 「바즈셀로나」백작의 허락을 받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딸 「카르멘」은 「스페인」의 유명한 심장학의사와 결혼해버렸다. 그러나 「프랑코」는 결국 외손녀 「마리아·델·카르멘」양을 「알폰스」에게 시집보내게 되어 어떻든 주가와 결연을 맺게되었다. 【파리=장덕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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