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의 태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신년은 「신춘」이라고도 말한다. 한자전을 보면 신세·신양·신춘이 모두 신년과 통한다.
고대 「페르샤」인들은 정말 봄이 시작될 무렵을 신년이라고 했다. 중국인들도 입춘을 세수로 지내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한 여름(현재의 7월께)의 첫 만월일을 세수라고 했다.
인종·계급·종교가 각기 다른 인도와 같은 나라는 역도 12종이나 있어서 정월을 열두번이나 지낸다.
현금은 「그레고리」력, 이른바 「신력」에 따라서 모든 나라의 정월이 공통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정월의 절후와는 상관없이 신년을 「신춘」으로 맞는 그 관습만은 어느 곳이나 매일반인 것 같다.
신년은 희망과 번영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또 주고받는 세수의 인사도 그런 축복들이다. 비록 어제의 음울한 나날, 심통한 생활일지라도 오늘 세수가 되면 사람들은 심기 일전, 마음 한구석에 희망의 빛을 갖고 싶어한다. 그것은 어두운 과거와 단절, 새로운 가능성의 「리듬」과 연결되는 시간의 신비작용이기도 하다.
봄은 생명과 약동의 계절이다. 죽은 듯 침묵하던 나뭇가지에서 생명의 용약을 볼 수 있으며, 검은 땅 그 침울한 암흑 속에서 움이 튼다. 고인들이 신년을 그 신춘에 견준 것은 그런 면면한 인간의 생명력과도 통하는 것 같다.
적어도 신년의 얼마동안은 누구나 그런 「신춘의 기맥」을 갖는다. 진부한 타성 속에서, 무기미한 환경 속에서, 비록 끝없는 좌절을 겪더라도, 우리가 그 신춘의 맥박으로 거듭 의지와 용기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더없이 귀한 조물주의 선물이다.
그러나 봄은 물이 흐르듯이 거저 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계의 변환 속에서도 하나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겨울이 지나야 비로소 봄은 서서히 시작되는 것이다. 그와 같다. 신년·세수라고 누구에게나 터무니없이 희망의 빛이 내리는 것은 아니다.
신년은 모든 것의 시작이지, 성취의 끝이 결코 아닌 것이다. 봄은 비록 저 멀리 피안의 것일망정, 지금 우리는 봄의 심기를 갖고 이 겨울의 추위를 이겨야 할 것이다. 마치 나뭇가지의 움들이 삭풍을 견디듯이, 꽁꽁 얼어붙은 땅 속의 「라일락」뿌리가 암흑과 결박을 이겨내듯이-. 이처럼 고난을 겪은 수목들만이 태동과 함께 눈부신 봄의 축제를 맞으며 또다시 생명의 찬가를 부를 수 있게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의기와 자세와 결단으로 연시를 보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각오의 날이기도 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