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내일에의 소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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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섣달 그믐이 지나면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이 오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 새해라고 유별나게 새로운 설계라고 특별히 생각한 일도 없고 묵은해라고 시원하게 잘 갔다고 느껴본 일도 과거에는 없었지만 금년만은 이 해야말로 1분 1초라도 빨리 가버렸으면 했다.
너무나 애처로운 큰 화재사건도 날이 갈수록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겉만 근사하게 하는 알맹이 내용 없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대로 슬쩍하려는, 인간의 생명보다도 돈을 더 소중히 아는 사고방식, 엉터리 속임수로만 일관되는 모든 처사, 이런 것들이 결국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지만 새해부터는 좀 줄어들었으면 한다.
누구라면 곧 알 수 있는 어떤 분이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던 자기 직장을 버리고 나갔다. 남자란 언제나 진퇴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 그 지론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산 속으로 가느냐 하였더니 빙그레 웃기만 한다. 소위 남을 가르친다는 나도 자신이 없어 그야말로 산 속에나 들어가 조용히 살아볼까 하는데 그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낙향(?)하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런 것 저런 것을 따지지 않으련다. 과거는 따져서 무엇할까. 사람은 미래가 있길래 소망을 가지고 산다. 「셸리」의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는 말도 있지만 정녕코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자연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세계에도 우리 한국 땅에도 춥고 어둡고 세찬 바람이 가셔지고 따뜻한 봄빛이 찾아오리라고 믿는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고 아끼고 하는 봄이 왔으면 한다. 왔으면이 아니라 꼭 오리라고 믿는다. 항상 내 머리에 떠오르는 글귀하나가 있다. 『잠시 좀더 기다려보자.』 영국자유당 당수요 수상이었던 「아스퀴즈」가 즐겨 쓴 귀절이다. 영국인다운 품위가 있어 좋다. 무엇이든 너무 서두르기만 하고 조급하게만 구는 우리국민들이 되씹어 볼 말 같다. 새해는 3백66일, 하루가 더 길다. 어디 좀 더 다같이 기다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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