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실세’ 왕둥싱, 마오 사후 권력지도를 바꾸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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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초기인 1966년 9월 15일 황혼 무렵, 왕둥싱이 홍위병 접견을 위해 천안문에 오르는 마오쩌둥을 수행하고 있다. 마오는 “왕둥싱이 옆에 있는 게 습관이 돼 버렸다”고 그를 평가했다. 오른쪽은 21년간 마오의 수석간호사였던 305의원 부원장 우쉬쥔(吳旭君). [사진 김명호]

생존해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안 쓰려고 했다. 그러나 1976년 밤 4인방 제거 당시 왕둥싱이 없었더라면, 화궈펑과 예젠잉의 4인방 체포는 꿈도 못 꿨을 일이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자 왕둥싱은 화궈펑을 지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궈펑은 마오가 생전에 지명한 후계자였다. 화궈펑이 4인방 제거를 제의하자 왕둥싱은 두말없이 동조했다.

왕둥싱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화궈펑은 리셴녠을 찾아갔다. 예젠잉의 의중을 타진해 보라고 부탁했다. 리셴녠의 방문을 받은 예젠잉은 왕둥싱의 생각이 어떤지를 가장 궁금해했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심장부를 움켜쥐고 있던 사람이 왕둥싱이었기 때문이다.

왕둥싱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적은 없었지만, 1955년 소장 계급장을 받았다. 마오쩌둥 경호가 주 임무였다. 잠시 고향 장시(江西)성 부성장을 지낸 것 외에는 중난하이를 떠난 적이 없었다. 직책도 중앙판공청 주임, 공안부 부부장, 중앙경위국 제1서기, 베이징 위수사령부 서기, 중앙군사위원회 경위국장 등 다양했다. 이쯤 되면, 베이징 시내의 비밀경찰과 공안, 군복 입은 사람들은 모두 왕둥싱의 부하였다. 당·정·군 수뇌들의 일거일동이 손바닥 안에 있었다고 봐도 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마오쩌둥의 왕둥싱에 대한 평가가 재미있다. “그는 항상 나와 함께하려 했다. 나도 왕둥싱이 보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된다. 옆에 있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둥싱도 사람이다 보니 나처럼 장·단점이 있다. 세심하고 주도면밀함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론이나 문화수준이 낮고 머리 쓰기를 싫어하지만,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뭐든지 아는 척해서 조롱 받는 것보다는 낫다. 한(漢)대의 주발(周勃)을 봐라. 머리에 든 건 없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공을 세웠다. 모시는 사람에게 명예를 안겨줬다. 왕둥싱과 손을 잡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오쩌둥이 한때 머물렀던 곳을 방문해 방명록에 휘호하는 왕둥싱. 1995년 9월,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왕둥싱과 마오쩌둥의 인연은 1947년 3월 18일, 홍색도시(紅色都市) 옌안(延安)에서 시작됐다. 46년 6월 하순, 국·공내전이 발발됐다. 인민해방군은 도처에서 승리했다. 6개월 만에 71만여 명의 국민당군을 전멸시켰다. 국민당군도 공산당이 지배하던 105개 도시를 점령했지만 병력 손실이 컸다.

1947년에 들어서자 장제스는 전략을 수정했다. 전면전을 포기하고 중점지역에 34개 여단, 23만 명을 배치했다. 애장(愛將) 후쫑난(胡宗南·호종남)에게 공산당 근거지 옌안을 점령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당시 인민해방군 주력은 전선에 나가 있었다. 옌안 주변에는 이렇다 할 전투부대가 없었다. 마오쩌둥은 옌안 철수를 결정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옌안을 떠나지 않겠다”며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오는 이들을 모아놓고 설득했다. “옌안에 10년을 있었다. 맨손으로 굴을 파서 살 집을 마련했고, 황무지를 개간해 곡식을 일궜다. 간부 양성과 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항일전쟁을 지휘하고 혁명을 전파했다. 중국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혁명성지 옌안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여기를 떠날 때가 됐다. 전쟁에서 한 지역을 얻고 잃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철수와 도망가는 건 다르다. 지금 떠나면 철수지만 뭉그적거리면, 그때는 도망가야 한다.” 회의장에 폭소가 터지자 만고의 명언을 남겼다. “땅을 잃어도 사람만 있으면, 사람과 땅을 보존할 수 있다. 땅을 보존한다 하더라도 사람을 잃으면, 땅과 사람을 모두 잃게 된다(存人失地, 人地皆存. 存地失人, 人地皆失).”

3월 15일, 국민당군 전투기가 옌안을 공습했다. 옌안 군민의 조직적인 철수가 시작됐다. 18일 오전 옌안성 30리 밖에 국민당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성과 총소리가 요란했지만 마오쩌둥은 요지부동,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재촉하는 저우언라이와 런비스(任弼時·임필시) 등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급할 것 없다. 당황하지 마라. 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본 다음에 떠나겠다.”

저우언라이가 다시 건의했다. “주석 대신 다른 동지가 남아있다가 적을 확인하게 하자.” 당시 주변에는 마오를 경호하기 위해 달려온 경호원들이 몇 명 있었다. 마오쩌둥이 그중 한 명에게 물었다. “낯이 익다. 이름이 뭐냐.” “왕둥싱입니다.” “내 대신 남아서 적을 확인하겠느냐.” “주석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마오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좋다, 병력을 주마. 원하는 대로 말해봐라.” 왕둥싱은 우물거리지 않았다. “1개 분대면 족합니다.” 마오는 또 한바탕 웃었다. “간이 크구나. 내 부하 자격이 있다. 기병 다섯 명을 더 주겠다. 내 대신 적들을 보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같이 가자. 이왕이면 몇 놈 날려버리고 와라. 그래야 속이 시원하겠다.”

왕둥싱은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마오쩌둥은 연신 왕둥싱의 등을 두드리며 기뻐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설인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 그때 당 태종의 기분이 어땠을지 알 것 같다. 오늘부터 내 옆을 떠나지 마라.”<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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