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문단에 인 「조르지상드」 「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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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쇼팽」과의 세기적 연애로 더욱 유명해진 19세기 이상주의 「프랑스」 여류문인 「조르지·상드」서한문, 자숙전이 「가르니에」, 「갈리마르」, 「플라마리옹」등 「프랑스」의 3대 문학출판사에서 최근 발간되어 「파리」의 가을 문단을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가르니에」사에선 1847∼1848년의 「조르지·상드」의 편지를 실은 『조르지·상드 서한집』 제8권을 내놓았고 「같리마르」사에선 『조르지·상드 자서전적 작품』 제2권을 출판했으며 「플라마리옹」사는 『어느 여행자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상드」의 「마오르카」·「오베르뉴」 지방여행기를 발간했다.
『친구여, 하긴 나도 편지를 못 냈지만 왜 그대가 나에게 먼저 쓰지는 못하오? 슬픔에 잠긴 나에겐 그대의 편지야말로 나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었을텐데….』 이렇게 시작된 「상드」의 서한안문 제8권은 3백31장의 편지를 수록하고 있는데 그중 1백20장은 처음으로 공개된 편지들이다. 아름다운 「노앙」(그녀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의 여름은 끝나고 「쇼팽」의 「멜러디」가 가정불화의 소동을 달래주던 시절이다.
「상드」는 그녀의 남편 「클레셍제」와 딸 「솔랑지」와 막 헤어져 쓰라린 고뇌를 친구 「에마누엘·아라고」에게 소상히 전하고 있다. 남편과 딸을 잃어버리고 「쇼팽」의 음악으로 자신의 번뇌를 달래고 있는 첫 편지는 장장 71장이나 되는 긴 편지다. 『클레셍제(남편)의 날카로운 아우성에 놀라 나는 마치 내 생명을 갉아먹는 듯한 심정으로 계단을 내려왔어요. 조용히 「클레셍제」를 진정시켜 들고있던 쇠망치를 빼앗았어요.
둘을 모두 죽이겠다고 고함을 치는 「클레셍제」의 머리칼을 내가 쥐고 「모리스」(상드의 아들)가 팔을 비틀어 겨우 망치를 빼앗았어요.』
남편과의 격투가 있은 다음 「상드」는 남편의 편을 든 「쇼팽」과 드디어 결별하게 되는데 편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이 무슨 팔자이며 이 무슨 결별인가! 그의 좁은 소견과 폭군적인 성격에 반발하면서도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앞서고 그를 번민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9년 전 나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인 그와 인연을 맺지 않았던가? 나는 항상 그이의 눈초리와 위협을 느끼고 살았어요. 단 한번이라도 그를 슬프게 하거나 근심케 했던들 그이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이렇게 슬픔에 찬 과거를 「아라고」에게 털어놓는다.
사랑의 번민으로 죽게된 「조르지·상드」는 19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잠시 정치에 집념케 된다. 그녀는 혁명 대열에 참가하고 「인민을 위해서」란 신문을 만들어 모든 정열을 쏟았다.
전에 「알프레드·뮤세」나 「마리·도르발」을 찬양하듯 이젠 「공화국」을 외치고 있다. 혁명의 여진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어느 날 그녀는 인생을 체념한 듯 친구 「폴린·비아르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냈다
『내 생애는 끝난 것 같아요. 이젠 조용히 자서전만 쓰게되면 내 과업은 끝난 것 같군요. 날이 갈수록 내 자신을 초월해서 무슨 어려운 일이든, 더 나아가 죽음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예요. 아마도 지금 쓰고있는 내 일생기가 유언이 될 것 같군요.』
이 편지가 끝난 후의 「상드」의 생애는 「갈리마르」사의 『조르지·상드 자서전적 작품』과 「플라마리옹」사간 『어떤 여행자의 편지』에 잘 반영되어있다.
그녀는 뒤의 두 작품을 극히 「로맨틱」한 산문형식으로 쓰고 있다. 이상 두 작품에서는 독자들을 「나의 형제」라 부르기도 하며 「프란츠·리츠」의 음악을 논하고 고요한밤, 성스러운 신비, 사회, 공화국 등을 얘기하고 있다.
「알프레드·뮤세」 「쇼팽」등과의 연문으로 세기적 여걸이 된 「조르지·상드」는 감상적 소설 『인디아나』로 문단에 「데뷔」, 사회문제에 깊이 참여하고 전원 소설가로 크게 성공했고 특히 풍부한 그녀의 서한문은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부사조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파리=장덕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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