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동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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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수동은 사실은 시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가 남긴 풍자와 기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김흥근이란 사람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마침 그 집의 3, 4세쯤 된 행랑 아이가 엽전 한 잎을 삼켰다 하여 행랑어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멈은 자기 자식을 살려달라고 정수동에게 매어 달렸다. 『뉘 돈을 삼켰느냐?』고 정이 물었다. 『제가 가졌던 돈 한 푼을 삼켰어요.』 어멈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정수동은 행랑어멈을 이렇게 달래었다. 그까짓 제돈 한푼쯤으로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이 집 주인대감은 남의 돈 2만량쯤 삼키고도 까딱도 없는데….
정수동이 살던 때에도 어지간히 남의 돈, 나라의 돈을 횡령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은 벼슬을 이용해서 돈을 긁어모았다. 벼슬이 없는 사람이라도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에 붙어서 돈을 모았다
그만큼 국고는 메마를 수밖에 없었고, 백성들의 살림도 쪼들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군소리하나 하지 못했다. 좋은 자리에 있을 때 배를 채운다는 건 어느 면에서는 당시의 당연한 풍조였던 것이다.
수협서 억대의 부정사건이 터졌다. 농개공에서 수억대의 부정으로 직원들이 무더기 고발됐다. 어느 구청의 직원들은 6만원을 착복했다. 어느 경감은 또 무슨 수로 돈을 모았는지 억대도박에 한 몫 끼었다….
이 모두가 최근 2, 3일간의 신문지면에 보도된 것들이다. 밝혀지지 않은 부정이 얼마나 더 많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뼈 속까지 곪은 것을 그저 고름만 짜내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그러나 정수동의 얘기에는 조그마한 사족이 붙어 있다. 행랑어멈과 정수동이 주고받은 말은 엿듣던 주인대감 김흥근은 낯이 뜨거워져 바로 그 돈 2만량을 본처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정수동의 시대에는 그래도 한 가닥 양심만은 잃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빈들거리면서도 멀쩡하게 천수를 다했던 것도 우습다. 정수동은 벼슬 한번 해보지 못한 가난한 선비였다. 언제나 꾀죄죄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그의 풍모였던 모양이다.
이런 인물을 지금은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뿐이 아니다. 정수동은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며 기식하고 김흥근에게 대하듯이 거침없이 바른 말을 퍼부었다.
그런 그를 벼슬아치들이 멀리하지는 않았다. 뒤가 구려서였는지, 또는 그만큼 옛사람들의 통이 컸는지. 어쨌든 김흥근만한 인물도 이제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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