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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비유학 과학도, 미 1위 특수페인트 회사 일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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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12차 세계한상대회를 지휘한 홍명기 미국 듀라코트 회장은 “한상대회가 우리 창조산업의 핵심 자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정현 기자]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제12차 ‘세계한상(韓商)대회’가 지난달 31일 닷새간의 일정을 마치고 폐막했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기업 활동을 벌이는 3000여 명의 기업인이 한자리에 모여 고국을 위한 발전 방안, 네트워크 강화 방안 등을 논의했다. 대회장으로 행사를 지휘한 홍명기(79) 미국 듀라코트 회장을 만났다. 운영위원들과 함께 지난 1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JTBC를 찾은 홍 회장은 “세계한상대회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갈 한국 기업인들에게 늘 열려 있는 교류와 소통의 장”이라며 “이번 대회를 통해 소통 강화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듀라코트’는 미국 시장 점유율 1위의 특수코팅 페인트 회사다.

 -‘늦깎이 기업인’이자 ‘아이디어가 곧 창업 밑천’이라 하는 창업 전도사로 많이 알려졌다. 시작은 영화제작자였다는데.

 “서울대 문리대에 낙방하고 1954년 국비유학생 시험을 봐 미 콜로라도대 화학과로 진학했다. 부친(홍찬·1909~64)이 평화신문(훗날 대한일보)을 발행하고 수도극장(2005년 문닫은 스카라 극장의 전신)을 운영했다. 수도극장은 단성사·국도극장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극장이었다. 영화제작도 하셨는데, 미 로스앤젤레스(LA)에서 영화사 MGM과 협업도 했다. 동양 최대의 ‘안양촬영소’를 설립할 무렵, 당시 한국내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콜로라도에서 LA로 날아가 부친을 도우며 캘리포니아주립대(UCLA)를 졸업했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영화제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 영화가 적성에 맞지 않았나.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영화일이었다. 영화일을 그만두고 전공을 살려 미국 페인트회사 ‘휘태커’에 입사했다. 연구원 30여 명 거느린 연구소장도 되고, 새 물질을 개발해 회사에 큰 수익도 안겨줬지만 회사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같이 입사했던 백인 동기가 회사 대표가 되는 걸 보면서 내 사업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나이 쉰하나였다.”

 - 51세 창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내의 지원, 격려와 창업자금 2만 달러를 밑천으로 ‘원맨쇼’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대학 다닐 때라 등록금 등 목돈이 크게 필요할 때여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게다가 휘태커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체결한 비밀유지계약이 있었다. 안되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도전이었다. 아예 새로운 뭔가를 개발해 내야만 했다. 오히려 아이디어를 자극한 셈이다. 이전 회사에서 쓰던 기술과 원료 말고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특수페인트를 만들었다. 전 직장 거래선인 일본 스미토모가 듀라코트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창업자금이 다 떨어질 무렵 150만 달러 어치를 스미토모에 팔았다. 수익만 120만 달러였다. 밤을 잊은 연구 끝에 얻은, 아이디어의 결실이 큰 이득으로 돌아왔다.”

 -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2001년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해 미국 동포사회에 7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모교 UCLA 등 여러 대학에 한국과 아시아 관련 연구과정 설립을 지원했다. 아버지 사업을 도우며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웠을 때, 대학 교수님이 자신의 저축을 털어 학비를 대주셨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게 당연하다.”

 -듀라코트가 ‘소수인종 경영 기업(MBE) 인증’을 받았던데.

 “미국에선 소수인종에게 대학 입학시 우대를 해주는 것처럼, 소수인종이 창업·사업을 하는 데도 사회적 배려가 있다. 미국에서 사업하는 다른 한상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런 제도를 알리고 이용하라 권유하고 있다. 이런 인증제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있는 것이라면, 한상대회는 한상 스스로가 구축한 시스템이다. 서로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고 교류하며 더 큰 발전을 도모할 기회가 바로 한상대회다.”

글=강승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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